1. 역사의 흐름 속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은 1879년 8월 충남 홍성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당시 조선의 국운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외국 세력이 점차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청, 일본, 러시아의 싸움터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수
1.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
아마 중학교 때 쯤 일거다. 그곳을 처음 알게 된 때가……. 내가 아는 것이라곤 한용운 선생님께서 그곳에서 사셨다는 것과 우리나라 가옥으로서는 드물게 북향집으로 지어졌다는 사실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심우장’이라는 이름을 떠올려보면 어딘가 모를 매운 향내가 느껴지는 듯 했다. 그게 어디
1. 만해의 사상의 배경
만해는 1879년 충남 홍주(직금의 홍성군)에서 韓應俊의 둘째로 출생하였다. 이때는 조선왕조의 봉건체재가 수백년에 걸친 내부적 모순의 누적 및 강대한 외세의 침투로 말미암아 뿌리채 흔들리던 시대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태어난 만해는 고향의 서당에 다니면서 정규적인 한문
심우장]을 짓다. 이 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 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935년 4월 9일 :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1939년 : 회갑을 맞아 박광, 이원혁, 장도환, 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청량사 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1944년 6월 29일 : 심우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생을 마쳤다.
2. 작가의 문학적 특성과 사상
1) 불교적 진리로서 부정적
심우장에 모시며 5일장을 지냄.
1938년
- 신불교를 통해 다수의 논설 발표.
1939년
- 11월 1일, 조선일보에 ‘삼국지’를 번역, 연재 시작.
1940년
- 박광, 이동하 등과 창씨개명 반대운동 시작.
- ‘통도사사적’ 편찬을 위해 수백 매의 자료를 수집 (미완성)
1944년
-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생을 마쳤다.
2. 만해(萬海) 한용운의 사상
1) 공사상
인간이 궁극적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으로 이러 모든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법신사상
법신이란 수많은 개별적 존재들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정인보, 박광, 홍명희, 송월면, 최범술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Q.
심우장에서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1944년에 65세로 입적(入寂) 【명사】【~하다|자동사】 『불』 중이 죽음. 열반(涅槃). 입멸(入滅)
하였다. 한용운,「님의 침묵」, 『범우사』, 2002, p196-197
②(작가 활동 당시의) 시대적 배경
1920년대 시대적 배경
① 3·1 운동 : 1920년대 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