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퇴계이황의 생애
퇴계는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진성이씨 치(値)의 아들로 연산군 7년(1501) 11월 25일의 일이다. 아버지는 이때 40세, 어머니는 32세, 위로 형이 여섯, 누이가 하나인 7남 1녀 중의 막내아들로 탄생한 퇴계는 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이었다. 그래서 여러 자녀
<퇴계이황의 생애>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지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리 철학은 대체로 향촌에서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을 가진, 생활이 비교적 안정된 사림들이 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Ⅰ. 서론
퇴계 이황이라는 사람은 한마디로 하면 겸허라는 두 글자이다. 그는 평생을 잘난 척하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법이 없었던 것 같다. 겸허는 그의 행동뿐 아니고 글 속에 찬찬히 배어 있다. 죽음에 임해서도 그는 장례를 아무쪼록 간소하게 치를 것이요, 묘비는 조그만 돌에
Ⅰ. 서 론
현대교육에 있어 과거 교육학자의 발자취를 잘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교육학자의 가치관과 철학이 현대 교육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귀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근대 교육학자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퇴계 이황일
1. 서 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남명 조식선생은 조선 전기 유학의 거두로 인식되지만, 치열한 당파 싸움과 정적들의 견제속에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널리 펴지 못하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을 도모하는데 일생을 바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시 사회는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억압이 한창이던
Ⅰ. 조선시대 교육사상가 퇴계 이황(성리학)
1. 교육의 사상
퇴계학은 16세기 조선의 역사적 산물이면서, 그의 역사의식과 인간의 식의 표현이다. 따라서 퇴계학을 성리학의 동방별종(東方別宗)으로 보거나, 아니면 한국 철학의 독자문호(獨自門戶)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전자는 철학적
Ⅰ. 조선 성리학 퇴계 이황 교육사상(교육철학)
`생각한다`는 것과 `배운다`(실천)는 것은 서로 영향(자극)을 주고 서로 유익한 것이라야 한다. `생각한다`도 `배운다`도 결국에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마음의 본연의 자세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敬을 지닌다`가 되는 셈
이황이 지은 시는 2천여 수나 되지만 시와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도산십이곡>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산십이곡>은 그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한자어가 많이 생경한 감을 주지만, 이황이 고도의 한학자이면서도 한글을 통한 쉬운 어법을 구사하여 특출한 언어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