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은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올바르게 이해하거나, 자신의 말과 글을 다른 사람이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일정한 법칙이 문법이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주시경의 문법 기술은 포괄적인 문장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하게 아홉 기난이 각각 또 결에가 잇는데
주시경(1876-1914)은 국어 연구와 운동을 통해 일제침략에 항거한 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황해도 봉산 출생이다. 어렸을 때는 상호(相鎬)라 불렸지만 한힌샘, 백천(白泉)이라고도 불렸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던 중 신학문에 눈을 떠 1894년 9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도중에 인천
문법 기술과 기능과 역할 중심의 격에 대한 인식이 시대적으로 얼마나 앞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주시경의 연구가 시대를 앞서면서도 아직까지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의 문법이 매우 독창적이었으며, 그의 문법 의식이 철저한 과학성과 논리성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1. 주시경의 삶과 국어연구의 수리학적 바탕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국어 연구와 운동을 통하여 일제침략에 항거한 국어학자 이자 국어운동가 이다. 본관은 상주이며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백천(白泉)·학신(學愼)으로도 불린다. 1887년 12세 되던 해, 서울에 있던 큰아버지 면진(冕
월성분이지만 '임, 씀, 남'은 '줄기'에, '금'은 '이'에 붙어 있는 '빗'과 함께 '가지'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서술 순서에서도 '임, 씀, 남'과 '금' 사이에 차이를 두고 있다. 같은 '이, 빗, 듬' 임에도 불구하고 '임, 씀, 남'을 함께 먼저 제시하였고, '금이, 금이빗, 금이듬'은 따로 뒤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
선생의 나이 13세(고종 25, 서기 1888년) 되던 봄에, 서울서 처가 (안동 권씨 댁) 살이하던 큰아버지되는 학만 씨가 시골선생댁에 와서 형제분이 의논한 결과, 선생을 양자로 정하여 서울로 데리고 올라오게 되었다. 학만씨는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었으나 괴질로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큰 아버지,
주시경(周時經) 선생은 이 "한 글"이라는 단어야말로 우리의 위대한 글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 듯하다. 사실 오늘날 따져 보아도 한글이라는 이름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고, 위대하고, 바른 글자`를 가리키는데 알맞다.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이라는 글자와 함께 한글을 만든 목적
주시경학보 》13집. 1994. 탑출판사
이 논문은 ‘이다’와 관련된 논의의 원인과 의견의 대립 양상을 연대별로 다룬다. 1956년 이후 학교 문법 통일 안에서 ‘이다’에 대한 규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밝히는데 그 논의를 통시적인 차원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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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국어문법』의 심층구조의 인식과 변형적 처리
주시경 선생의 예문의 제시방법과 구문의 분석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음미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많다. “본드(예문) 一, 二 ……”와 같이 번호를 붙여 예문을 들고 도해(圖解)를 하면서 설명을 붙이는 것은 생성문법의 방식을 연상케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은 조선이 쇄국정책을 버리고 최초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었던 1876년 12월 23일 황해도 봉산에서 가난한 선비 집안의 6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웠던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어려서부터 끼니 굶기를 예사로 하였으며 그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주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