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 신라는 528년(법흥왕 15)에 불교를 공인하고 불교 국가가 되었다. 불교는 여러 민족이 지혜를 모아 정착시킨 것으로, 이로 인해 동아시아 전역이 불교문명권이 되었다. 불교는 고대의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중세의 보편주의를 이룩하게 하는데 중
화엄학의 대가였던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의상은 귀국 직후 화엄십찰을 건립하여 화엄학의 전교 도량으로 삼았다. 그 10개의 사찰 가운데, 스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부석사이다. 부석사는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태백산 봉황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Ⅰ. 발췌요약
1. 갈만한 곳(이육사 문학관)_
퇴계 종택을 지나 산을 넘자 이육사 문학관이 나오고 원촌 마을이 꿈결같이 아른거렸다. p12
2. 알아볼 것(화엄학)_ 『삼국유사는』는 의상 스님에 대해 “김한신이 아버지고 29세 황복사에 몸을 맡겨 머리 깎고 승려가 되었다.…(중간 생략)…국경(고구려)
균여의 계통인 개태사의 수기, 천기 등으로 법계가 교체되면서 화엄학의 내용이나 성격이 바뀌어 의천에게 비판받았던 균여의 화엄학이 재평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도 역시 의천 직계의 덕소 등에서 백련사의 요세로 법계가 바뀌면서 禪과 구분되어 法華의 실천신앙이 강조되고 있었다.
화엄학을 배우고,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문무왕 때 귀국한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학을 퍼뜨리면서 정치적 자문 역할을 하였다. 화엄일승법계도 등 많은 저술을 낸 의상의 화엄사상은 모든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포용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와 화엄사상>
I. 序論
「균여전」의 향가 11수는 「삼국유사」의 15수와 함께 우리말을 기록할 문자가 없던 시기에 한자 음훈을 차용하여 우리 말소리를 표기하던 향찰로 기록되어 전하는 희귀한 가요 자료들로서 문학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균여전』을 통해 고려 초 화엄학
화엄학의 거장으로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떨친 균여대사(928~973)의 인물과 행적의 전모가 새롭게 드러나면서 화엄 敎學에 관한 60여 권의 저술과 그가 제작한 국풍 가요 普賢十願歌가 학계의 지대한 관심 아래 논의, 연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패강, 『향가문학의 이론과 해석』, 일지사, 2001, 584
화엄학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신이한 자취를 남긴 고승이기도 했다. 그의 영이담 가운데 몇가지만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949년 光宗의 황후 大穆의 瘡疾을 고쳐주고, 대신 창질을 맡아 앓게 된 양순공이 죽게 되었을 때, 균여가 呪願하여 홰나무에 移瘡케 하여 양순공을 救病하였다.
(2) 953년 오랜
화엄학을 배우고 문무왕 10년(670)에 귀국하여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계속 내려와 고려 광종대에 와서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였다. 이를 위해 광종은 균여를 개성의 귀법사 주지로 임명하여 화엄종의 재확립을 지향하였다.
화엄사상은 모든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존
1, 요약
“800여 년 전 일연 스님(1206~1289)이 홀로 전국을 헤매었듯이 나도 일연 스님과 무슨 인연인지 나그네가 되어 전국을 방랑하면서 돌고 돌았다.” p.4 이 책은 역사적 공간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체험적 역사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한국문학사는 어떤 모습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