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한 이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인 근현대사의 시작을 정치적으로 다스렸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다.
아들이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다.
석방되었다. 1910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정계의 배후조종자로서 활약,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護憲三派:憲政 ·政友 ·革新俱樂部) 성립에 진력하였다.
흥선대원군 -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가.
호 : 석파(石坡)
본명 : 이하응(李昰應)
별칭 : 자 시백(時伯), 시호 헌의(獻懿)
#. 고종[高宗]
▶ 조선 제26대 왕(1864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 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인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로,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방(貞善 坊) 소재의 흥선군 사제(私第)에서
李昰應)--> 둘째아들 ‘命福’(載晃)
* 1863년 12월 26대왕으로 12세의 어린나이로 등극.
* 이하응(1820~1898) : 12세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윈 뒤 불우한 청년기를 보냄.
3) 대원군의 집권 과정
조대비 : 순조의 아들 익종(효명세자)의 왕비, 헌종의 어머니
2. 내정개혁
이러한 상황
李昰應은 유명무실해진 왕권회복을 위해 切齒腐心, 시정에 엎드려 기회를 엿보다 철종이 後嗣없이 승하하자 어린 아들 命福을 내세워 왕위를 승계하는데 성공하고(1864, 고종즉위), 2년 뒤에는 驪興 민씨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딸-민아영은 8살에 부모를 여
Ⅱ 흥선대원군의 삶과 정치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李昰應은 유명무실해진 왕권회복을 위해 切齒腐心, 시정에 엎드려 기회를 엿보다 철종이 後嗣없이 승하하자 어린 아들 命福을 내세워 왕위를 승계하는데 성공하고(1864, 고종즉위), 2년 뒤에는 驪興 민씨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딸-민아영은 8살에 부모를 여
집권전의 행적을 통해 본 대원군의 성격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1820년(순조 20년) 12월 21일 서울 안국동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이 태어난 해 우리나라는 천재지변에 각종 괴질까지 겹쳐서 인심이 몹시 흉흉했었다. 이처럼 혼란한 세월에 태어났으면서도 흥선대원
배 경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와 강재로 미·일 화친조약을 맺게 되고 강제로 항구를 개항하면서 일본의 문호개방이 시작된다. 그리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강대국으로 발전하게 되고 지속적인 외교 교섭을 취하였으나 실패하고 이후 일본은 일방적으로 국교를 단절하고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