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삼(牟宗三)의 유학 3기설, 이택후(李澤厚)의 4기설과 황옥순(黃玉順)의 신 3기설은 모두 형이상학의 입장에 의거해서 유학의 발전시기를 나눈 것으로 엄격한 판교(判敎)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문명 간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문명대화, 문화융합의 각도에서 유학을 나누면 중국문화의 당대 임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제1기와 제2기 유학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고, 신앙에서 문물, 법령제도에 이르기까지 국력, 기술과 기물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 중국인은 유학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해서 자신의 제3기를 완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종삼(牟宗三)의 유학 3기설, 이택후(李澤厚)의 4기설과 황옥순(黃玉順)의 신 3기설은 모두 형이상학의 입장에 의거해서 유학의 발전시기를 나눈 것으로 엄격한 판교(判敎)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문명 간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문명대화, 문화융합의 각도에서 유학을 나누면 중국문화의 당대 임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제1기와 제2기 유학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고, 신앙에서 문물, 법령제도에 이르기까지 국력, 기술과 기물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 중국인은 유학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해서 자신의 제3기를 완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종삼(牟宗三)의 유학 3기설, 이택후(李澤厚)의 4기설과 황옥순(黃玉順)의 신 3기설은 모두 형이상학의 입장에 의거해서 유학의 발전시기를 나눈 것으로 엄격한 판교(判敎)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문명 간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문명대화, 문화융합의 각도에서 유학을 나누면 중국문화의 당대 임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제1기와 제2기 유학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고, 신앙에서 문물, 법령제도에 이르기까지 국력, 기술과 기물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 중국인은 유학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해서 자신의 제3기를 완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종삼(牟宗三)의 유학 3기설, 이택후(李澤厚)의 4기설과 황옥순(黃玉順)의 신 3기설은 모두 형이상학의 입장에 의거해서 유학의 발전시기를 나눈 것으로 엄격한 판교(判敎)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문명 간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문명대화, 문화융합의 각도에서 유학을 나누면 중국문화의 당대 임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제1기와 제2기 유학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고, 신앙에서 문물, 법령제도에 이르기까지 국력, 기술과 기물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 중국인은 유학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해서 자신의 제3기를 완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종삼(牟宗三)의 유학 3기설, 이택후(李澤厚)의 4기설과 황옥순(黃玉順)의 신 3기설은 모두 형이상학의 입장에 의거해서 유학의 발전시기를 나눈 것으로 엄격한 판교(判敎)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문명 간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문명대화, 문화융합의 각도에서 유학을 나누면 중국문화의 당대 임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제1기와 제2기 유학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고, 신앙에서 문물, 법령제도에 이르기까지 국력, 기술과 기물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 중국인은 유학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해서 자신의 제3기를 완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종삼(牟宗三)의 유학 3기설, 이택후(李澤厚)의 4기설과 황옥순(黃玉順)의 신 3기설은 모두 형이상학의 입장에 의거해서 유학의 발전시기를 나눈 것으로 엄격한 판교(判敎)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모두 문명 간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문명대화, 문화융합의 각도에서 유학을 나누면 중국문화의 당대 임무를 명확하게 할 수 있으며, 제1기와 제2기 유학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고, 신앙에서 문물, 법령제도에 이르기까지 국력, 기술과 기물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부흥시킬 수 있다. 중국인은 유학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해서 자신의 제3기를 완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정만조 ( Man Jo Chung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2011] 제20권 1~27페이지(총27페이지)
葛庵 李玄逸(1627-1704)은 영남지방의 선비들을 退溪學脈 위주로 규합한 영남학파의 중흥조(中興祖)로 알려져 있다. 그는 張顯光 이후 山林學者로서 조정에 나간 유일한 영남출신 인물이었고, 吏曹判書라는 요직을 역임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顯達하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후일 名義罪人의 멍에가 씌어졌었다. 또 이로 인해 뒷날에 南人들의 벼슬길이 막혔다는 억울한 汚名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仁祖反正 뒤 사림정치의 방향은 점차 義理名分 위주로 흘러가면서 世道의 主宰者로서 산림의 정치적 역할이 크게 浮上하였고, 그에 반하여 군주의 불만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肅宗에 의해 黨人의 손을 빌어 黨人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朋薰의 기세가 꺾이게 되는데, 이른바 換局이 그것이다. 그 결과 산림이 약화되고 군주권이 강화되었...
김낙진 ( Nak Jin Kim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2011] 제20권 29~64페이지(총36페이지)
이현일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의 영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이다. 그는 이이에 의해 비판된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옹호하고자 하였는데, 정시한의 것과 함께 그의 비판서는 이황의 사후 등장한 가장 정제된 글이었다. 그의 비판에서 특히 눈에 띠는 점이 사단과 칠정의 근본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언뜻 보면 근본은 理 하나뿐이라는 주자학의 정신에 위배되는 오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근본을 둘로 설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대본상에서 불상잡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기를 대별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려 한 것에 있다. 그는 또한 理의 동정이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理가 제대로 실현된 정서가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형기 역시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형기에서 발생한 칠정은 인간의 타고난 취약성을 경고하지만, 동정이 있는 理(性命...
김학수 ( Hak Su Kim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2011] 제20권 65~99페이지(총35페이지)
이 글은 갈암학파의 성격을 남명·서애·우복·한강·여헌학맥의 수용양상을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현일의 갈암학파는 이황⇒김성일⇒장흥효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한 일군의 학문 집단으로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 영남학파의 실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인식은 이현일이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며 퇴계학의 수호에 앞장섰다는 점과 이현일의 문인집단이 종전의 학파들과는 달리 영남 전 지역에 걸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본고는 주로 후자를 설명하는데 주안점이 있으며, 남명학파권을 비롯하여 서애·우복학맥, 한강·여헌학맥까지를 두루 규합했던 갈암학파의 외연과 구성을 논증하였다.
이 논문은 17세기 조선의 격변기를 살았던 葛庵 李玄逸의 한시를 산수시·영사시·유배시로 나누어 연구한 논문이다. 그는 퇴계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였다. 그는 영남유학의 종장으로서 그 임무를 충실히 해 내었으며 틈틈이 시를 지었다. 그가 남긴 한시는 총 300여수로 다른 시인에 비해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갈암 이현일은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그 만큼 삶의 굽이굽이에 주옥같은 시를 남겨놓고 있었다. 그의 산수시는 경관 묘사가 아름답고 구성이 신선하며 호방한 정취와 속세의 티끌먼지를 벗어난 선경의 추구에서 긴장과 이완의 카타르시스가 넘친다. 그의 영사시는 기행의 정취가 많다.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여파로 민족의 정통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던 시기에 그의 역사의식을 피력한 시가로서 교훈과 당대현실에 선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