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端之心은 四德을 실현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나타나 있다. 즉 측은의 마음은 仁의 端 이고, 수오의 마음은 義의 端 이고 사양의 마음은 禮의 端이고 시비의 마음은 智의 端이다.
仁이란 공자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道理 라고 단정하고 있다. 즉 인이란 인간됨의 본질이라고 설파한 것이다. 맹자는
(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Ⅰ. 유교의 흐름
조선의 유교가 본격적인 이론적 탐구에 들어서게 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사단(四端: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과 칠정(七情: 喜怒哀懼哀惡欲)의 문제를 두고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이기(理氣)의 해석을 두고 이황의 주리론
四端이 있고도 스스로 능히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 해치는 자요, 그 임금을 능하게 하지 못한 자는 그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알아서 다 넓혀 채우면 불이 비로소 타고, 샘물이 비로소 흐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채우면, 사해를 보전할 것이며, 진실로 채우지 못하면
입히고 밥을 먹이는 것과 한가지라는 상징성은 공자의 四物(사물)이나 맹자의 四端(사단)과 그 뜻이 통한다. 김갑기, 「松江의 文學思想硏究」, 동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76, 215쪽.
청유의 표현과 대전제에서 소전제로 이어지는 표현은 훈계가 아니고 권유임을 나타낸다. 소와 말을 비유의 대상으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四端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仁義禮智’라는 네 가지 端緖를 묶어 하나의 용어처럼 사용한 뒤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와 성찰을 해 왔다. 그 영향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지까지, 동북아시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미쳤다. 또한 이는 학자들의 思想硏究에만 그친 것이
四端과 七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던 학자들은 점차 드러나지 않은 상태인 未發處의 心과 性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人性과 物性의 규정문제로 확대되었다.
18세기 초엽 조선조가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 율곡 계통의 학자 송시열
四端七情論辨)’의 시작이었다. 당시 고봉은 퇴계보다 스물여섯 살이 적은 청년 관료였다.
정지운은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고 주장했는데, 퇴계는 이 문장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사단은 리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 라고 수정했다. 이렇게 수정한 데는 일재 이
四端七情論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의미 있는 발언으로 생각된다.
. 도본문말론(道本文末論)이라 하여 문학의 가치를 폄하하던 도학파 문인들의 문학관과 이황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먼저, 윤선도와 이황의 시를 대비해서 이황 시의 색깔을 더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