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이 다름을 역설하고“선유는 궁리로서 격물치지하는 일이라 하여 지에 전속시켰지만 오직 왕양명만이 지행이 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하여 단지 격물과 궁리가 주자와 다름을 지적하면서 양명학을 변호하고 있다. 최명길이 양명학에 독실했다고 하지만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초창기의 호감과는 달리, 이황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학문적 비판비판의 내용은 대부분 양명학이 불교의 선종에 가깝기 때문에 유학의 정통을 이은 것이 아니며, 특히 인간의 도덕성을 부정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비판은 순수한 학문적
개념인 ‘이(理)’의 설은 유교에서는 본래 없었던 것, 불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성리학처럼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요체로서의 ‘이(理)’를 논하는 면을 보았을 때 자신이 바로 불교일 따름임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주자학에서 까다로운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의 대립은 불교의 본연성, 화
정신은 송대의 이정을 거쳐 주자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을 통하여 철학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이론화 되었다. 벽이단사상은 곧 유학(성리학) 이외의 이단과 사설을 배척함으로써 정통 유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보존하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외적으로 이단에 대립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물론
1. 왕양명의 생애
왕양명은 이름은 수인(守仁), 자(字)는 백안(伯安), 양명은 그의 호(號)이다. 성화(成化) 8년(1472) 9월 10일에 절강성 여요(余姚)에서 태어나, 가정(嘉靖) 7년(1528) 이향(異鄕)에서 객사하였다. 향년 57세의 나이였다. {연보}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진(晋)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왕람(王覽)으
설을 지향하고 있다. 무시선 무처선, 처처불상 사사불공, 영육쌍전 이사병행 동정일여 등의 표어는 원불교 교리사상의 실천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소태산은 1920년 그의 원불교 창건 5년 4월에 교리의 최초문서인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 하였다. 인생
설명하는 치인지학(治人之學)으로서의 유학(儒學)은,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는 발전하여 간다고 하는 진보주의적인 사상(思想)으로서, 객관성, 현실성, 상대성, 분석성, 구체성, 과학성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作爲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두 요소는 서로 혼촌(混存)하여 있어 어느 한쪽만을 말하
1) 민중불교의 대명사, 백련교와 백운교
5대 10국 이후에는 불교가 몰락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과 가장 긴밀하게 밀착되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선불교는 번쇄하고 비현실적인 논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자신 역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
퇴계선생은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원래 이황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의 형이 간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재야로 물러가 숨을 굳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황이 살다 간 16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