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당(中唐, 766-835)은 대력(大曆) 원년(766)에서 시작해 태화(太和) 9년(835)까지로 보아 안사(安史)의 난 이후의 약 70년 동안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안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전성을 구가하던 당 제국이 일시에 파괴되어 혼란에 빠진 끝에, 정치․경제면에 있어서나 문화 각 방면에 걸쳐 큰 변혁을 보여주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의 역사와 연혁
◎돈황(敦煌)
-위치 : 중국 감숙성(甘肅省) 북서부 돈황현의 현공서 소재지에 자리잡고 있음
-돈황의 역사
·하(夏)은(殷)주(周) 때 : 강융(羌戎)이 이땅을 차지
·진나라때 : 월지의 소유
·한나라 초기 : 흉노가 월지를 공격 혼야왕(渾 王)의 영지로 예속
·한
Ⅰ. 서론
산수화에는 `한`의 사상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진리관이 깃들어 있다. 고래로 한인들은 사물의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 그 근본 중심을 부이성에 둔다. 이것은 한국인의 대물관에서 오는 시방식의 특성이다. 우리가 보는 산수는 주관 쪽에서 객관적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의 일
그림을 10여편 이상 소장했을 뿐 아니라, 조선 초의 대 화가였던 안견의 [夢遊桃園圖]는 곽희의 구도와 준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곽희의 준법은 [卷雲준]이라 불리는데 붓의 터치가 둥글둥글 마치 말린 구름과 같다는 뜻에서이다. [조춘도]는 봄이 막 도래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눈이 녹고 산에는
산수화 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청록산수화가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남 산수화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전한다. 15세기, 경남 진주 출신인 강희안은 조선 산수화에서 한 획을 그은 안견의 화풍과는 다른 절파 화풍이나 원체화풍을 구사하였지만, 여전히 중국화풍을 벗어나지는 못한 상
I. 서론
한국의 실경을 주제로 한 진경산수화는 전통회화 중 풍속화 고려 불화와 함께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진경산수화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한국의 실경을 다루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것은 높은 회화미로 표출했고 그 결과 중국이나 일본 등 이웃 나라나 세계의 다른 어떤 문화권의 그림
원체제였으나, 점차 양반(兩班), 중인(中人), 상인(常人), 천인(賤人)의 네 계층으로 신분질서를 고정시켜 갔다. 양인이 양반, 중인, 상인으로 계층 분화하였던 것이다.
이 세 계층 중에서 조선 사회 신분질서의 특징적 면모는 바로 중인 계층에서 보이는 중간적 존재로서의 그것이다. 양반도 아니고 평
2) 조선 전기, 후기 사행문학의 특징
(1) 조선 전기 사행문학의 특징
조선 전기 사행문학은 해당 국가에서 견문한 정치와 역사, 문화, 풍속, 경관 등을 서술하는데 치중하였다. 특히 전기 사행문학은 견문한 바를 시로 써서 엮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사행원의 견문과 감상은 시를 통해 표현되었고, 이를
그림에 대해 한 말을 이어받아, “시는 소리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즉, ‘화(畵)’를 그보다 훨씬 고매한 장르로 여겨졌던 ‘시(詩)’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회화의 가치를 찾으려 했던 것인데, 강희안도 이와 관련해 “시화는 일법(一法)이라 여기에서 서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