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
보길도의 부용동정원은 우리나라 삼대 별서정원중(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野合)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 의 하나이다.
윤선도가 이 섬에 들어온 것은 1637년(인조15)
Ⅰ. 향약의 개념
향약은 두래와 비교하면 그 범위가 면단위의 지역사회이었다는데 특징이 있지만 두레와 같이 지연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직접 참여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향약은 어느 경우에나 실천덕목을 생활강령으로 한다는 사회교육적인 의미가 강하였다. 향약의 기본이념은 백성들을 교화하여
지금까지의 당쟁에 관한 연구는 그것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선악(善惡)의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일제학자들은 이러한 당쟁이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였고, 일부의 한국학자들은 당쟁이 요즈음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의․주장을 가지고 정책대
서론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 앞에 마주하고 있다. 본격적인 지구촌 시대의 한국학(Koreanology)은 이제 폐쇄적이고 고립된 형태의 학문체계로서는 더 이상 존립의 근거를 지닐 수가 없다. 개방적이고 열린 체계로서의 한국학, 그러나 민족학으로서의 오랜 전
◈기생 명부◈
관기는 ‘관물’이기에 관리용 명부가 있다. 이를 기생안이라 한다. 기생안은 ‘주탕안’처럼 따로 작성된 것도 있지만, 대개 관노들과 함께 엮인 ‘관안’이라 한 것에 속에 있다.
기생안에 기생은 수급비 또는 주탕과 구별하여 등재되어 있는데, 동기를 따로 구분한 것도 있다. ‘관
1) 사화의 의미
사화란 사림(史林)의 화(禍)를 줄인 말이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은 문을 숭상하고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유림이 중심이 된 사회였으나 이들은 각자의 사상과 감정, 또는 지연 등을 연고로 하여 파벌을 형성했으며 서로 논쟁하고 대립, 투쟁하면서 서로를 반역으로 몰아 목숨까지
고려시대의 감사기관
고려에는 2성 6부의 중앙통치기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 정무기관으로 기능한 것은 2성 가운데 중서문하성이었다. 중서문하성은 재부와 낭사로 구분되었는데 간관의 직임은 낭사에 부여되어 있었다. 낭사에는 산기상시, 간의대부, 보궐, 습유 등의 간관직과 기거사인, 기
-임진왜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삭제 혹은 수정필요-
이러한 인구감소는 전쟁의 피해인 농우(農牛)부족이 더해져 왜란 전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되었다.
난중에 조선민중이 가장 괴로워했던 것 중에 하나는 군량미 조달 이었다. 명나라 원군의 군량미는 의주까지만 운반
불행히도 한국의 근대사학은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하여 동경제대 출신의 학자들을 이른바 ‘조선사연구’에 투입하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한 사전준비의 일환이었다. 이들 일제학자들은 역사주의에 바탕을 둔 Ranke의
조선시대의 교육은 유교적이다. 유교적 사고방식은 아직도 우리들의 생활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융화되어 있다. 좋은 쪽으로는 군자학을 장려하고 인륜도덕을 숭상하고 청렴절의를 존중한점이다. 나쁜점으로는 가족주의의 폐해와 계습사상, 산업능력의 저하, 복고사상을 들 수 있다. 유교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