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와 시조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항 간에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저명 작가와는 달리 “모祖時武人 官至萬戶……”(『청구영언』의 작자 소개) 정도가 고작이었을 뿐, 시가 작가로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노산 이은상이 「시인 노계와 그의 예술」에
의병으로서 가정을 잊고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학자들이 지향하는 충효와 안빈낙도를 몸소 실천하면서 은거구도적(隱居求道的)인 삶을 살았다. 가사 <누항사>와 <경전가> 등 일부 한시에 가난으로 겪게 된 현실적 어려움과 갈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
가사문학(歌辭文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천의 도계향사(道溪鄕祠)에 제향되었다. 문집(文集)에 《노계집(蘆溪集)》, 작품에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등이 있다.
노계연보
1세 (명종16년, 1561) 영양 도천永陽道川에서 태어남.
13세 (선조6년, 1573) "대승음戴勝吟
가사를 남겼고 시조 67수, 한시 110수를 남겼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에 가담해 왜적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가 최초로 지은 가사인 ‘태평사’는 가장 태평하지 않은 시절에 지어진 가사다. 백의종군하여 부산에서 수병(水兵)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상관인 성윤문의 요청으로 병사들을 위무하기 위해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막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성윤문(成允文)의 발탁으로 종군, 1598년 왜군(倭軍)이 퇴각하자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가사(歌辭)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 ·선전관을 지내고 이
경우에도 복직시켜야 한다. 의병휴직기간 만료 후 근로자가 병이 완치되었다는 진단서를 첨부하여 복직을 신청하였다면 직무복귀지연 또는 직무감당능력 등을 들어 복직을 거부할 수는 없다(判).
②가사휴직이나 그 밖의 특정한 사유에 의한 휴직은 취로할 수 없는 사유가 소멸하면 근로자에게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기운 속에서 전국적으로 많은 여학교가 생겨났고 부인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들도 등장했다. 특히 1907년 애국계몽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해 쌀이나 패물을 모으는 등 가
의병술에서 연유되어 후에 승전을 기리며 팔월 한가위를 택해 연행했다는 군사목적설과 축제설이 있다.
분포지역 : 강강술래의 중심권인 서남해역은 한국 해양 문화의 중심지로 고대부터 일본↔한국↔중국으로 이어지는 해양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문화의 집결지이자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서
.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사, 시조, 사설시조, 언문풍월, 민요, 창가, 신시, 자유시, 산문시 등 시형과 주제 및 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 갈래의 시가들이 신구장르의 공존으로 다채롭게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1910년대의 주역들이 시에 문화의 접변기의 혼란 및 갈등을 반영하였고, 대부분이 서구문화를 경험한 신세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