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새로운 국토를 결정하는데 크게 고심하였다. 조선의 새 국토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과 지금 서울의 무악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계룡산이 가장 유력하였다. 태조의 계룡산 정도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계룡산은 풍수상의 신비성과 신도조성 등으로 인하여 이후 정감
조선건국세력은 신흥사대부중 급진적 세력과 개혁성향의 일부 무장세력이 결합함으로써 형성되었으며, 이성계, 정도전, 조준이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신흥사대부란 성리학자로써 과거에 급제한 문신들로 우왕 14년 6월 위화도 회군으로 전면 부상하였다. 이들은 통치 질서의 정비와 함께 국호를 조선
조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조선, 명, 일의 3국의 정세에 중대한 시기이며 이러한 원인의 시발점은 임진왜란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분열과 무책임한 집권층 하에서 외침에 대한 방비가 전혀 없이 임진란을 당하여 7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거의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많은 문화
조선교육심의회’에서 채택한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다.
2) 홍익인간의 출전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이다.
3) 단군신화에 나타난 홍익인간의 이념이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자연과 사람을 함께 다스리고 인도하는 일이다.
4) 현재의 세상을 밝은 세상으로 만들자는 현세중심적 이상국가 실현
조선초기에는『고려사』열전 열녀전이, 조선조에는『동국여지승람』열녀조 집필이 이루어졌고, 조선시대에는 문사들이 다양한 열녀전을 기록하였다. 강진옥,「열녀전승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본 여성적 대응 양상과 그 의미」,『조선시대의 열녀담론』, p59-86 참조.
이러한 ‘열녀전’ 류의 문학은
성리학이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덕, 조식의 사상과 양명학, 노장사상 등이 영향력을 아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대명의리론의 강화는 병자호란을 불러일으키고 조선은 이적인 청에게 무릎을 꿇지만 격렬한 주
가. 유학의 시발(始發)
사람답게 사는 길을 구현하는 것을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의 이념을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며, 수천년 동안 한·중·일등 동양 사상을 지배해왔다. 유학의 개창은 공자에 의해
기본적 인식 위에서, 일단 논자는 관심을 조선시대에 국한시키기로 하였다. 다른 시대에 비해서 보다 풍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는 점에서 현재 의 정치학적 논의와 결부시킬 수 있는 단초를 좀더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는 조금은 막연한 기대에서이다.
조선침략 전 일본의 상황
일본은 1443년에 맺은 계해약조에 따라 삼포[웅천(지금의 진해)의 내이포(또는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에는 일정한 숫자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무역활동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거왜인들보다 불법거주자들이 늘어갔고 그 폐단이 일어났다.
일본은 1467년 오
성리학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ꡐ광인(狂人)ꡑ이라거나 혹은 ꡐ화태(禍胎)ꡑ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