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종학파의 화폐이론의 가장 큰 특징이자 출발점은 화폐를 ꡐ은행화폐ꡑ로 정의하는 것에 있다. 은행화폐란 ꡒ은행이 고객(=기업)에 대부하기 위해 은행자신에 대해 자발적으로 無에서(ex nihilo) 창조하는 부채ꡓ를 말한다. 대부를 위해 창조된 부채인 은행화폐는 화폐발행자와 화폐사용
楮貨) 였다. 그러나 오fot동안 삼베가 실질적인 화폐 역활을 해왔기 때문에 백성들과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맨 처음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은 사헌부에서 였다.(태종 1년 10월 21일)사헌부의 반대이유는 쌀과 포(布)가 백성들의 주된 화폐수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쌀과 포가 주된 화폐가 된 것은
3. 태종 시기 화폐제도의 시행.
- 1) 명목 화폐(楮貨) 도입 배경
태조 3년(1394) 7월에 호조판서가 전폐제의 실시를 건의했으나, 채택 실시되지 못하였다. 그 당시 조선정부가 전폐제를 채용하지 않았던 점은, 고려시대에 철전이나 동전 등 각종 주화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해 거듭 시도한 화폐 유통정책
楮貨) 한 장으로 쌀은 1말 5되, 밀은 3말씩을 주게 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27일 전 판관 김귀융(金貴隆)을 평안도에 보내어 은(銀)을 채굴하게 하였다.
5월 7일 임금이 창덕궁 궁인 중에 병자가 많아서 중궁(中宮)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겼는데 모든 시설을 검소하게 하도록 명령했다.
11일 영의
楮貨를 인조, 통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저지 표면에 화폐가치만을 表章한 것이었다. 저화에는 주지와 상지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교환가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저화 1장에 쌀 한 되, 저화 40장에 정포(正布) 1필로 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는 저화가 國幣로 기록되어 있으나 續大
, 태종 1년 4월 좌의정 하륜의 건의에 따라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의 일종인 ‘저화(楮貨)’를 만들면서부터 조선의 화폐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행된다. 이러한 태종의 저화의 뒤를 이어 세종은 세종 5년(1423) 9월 당(唐)의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모델로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기에 이른다.
楮貨):태종 원년(1401)에 만들어진 법화. 이것은 주지(注紙)와 상지(常紙)의 두 종류가 있었다고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기는 하나 `속대전`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성종시대 이후에는 이 저화가 이미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측된다.
1. 조선통보(朝鮮通寶)
세종 5년(1423)에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모방하여 만
楮貨)의 유통 촉진에도 힘을 썼다.
관원으로는 영 1명, 승 2명, 주부(主簿) 2명을 두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변동되다가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혁할 때 이를 평시서(平市署)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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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상평창(常平倉)
고려와 조선시대에 곡가(穀價)를 조절하던 기관. 흉년에 곡가가 올라가면 곡식을 싸
제4장 한국경제발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요인(1-7절)
제1절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독립국가:
중국 다음의 일본과 공동 2위
가. 근대화의 시점(始點)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독립국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발명과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이 증가하는 등 경제적 변화도 많았다. 그러나 근대화(moderni
세종의 권력 확립과정
흔히 세종은 조선 시대에 즉위 했던 왕들 중에 가장 눈부신 업적을 남긴 왕이라고 말한다. 그는 당시 조선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또 그 것을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던 왕이었다. 조선이 세워지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새 왕조에 대한 권위를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