貊 扶餘와 高句麗의 正體性’ 문제의 초점은 예맥에서 비롯한 부여와 고구려의 동질성 확인에 있다.
Ⅱ. 文獻에 나타난 濊貊
1. ‘東夷’ ‘Altai語族’
1) ‘東夷’
우리민족문화의 바탕을 底礎하였던 청동기문화가 中原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하동서설 자체가 중국 新
貊), 우롱(五戎), 리우디(六狄)의 인민으로 나누어…….”고 기록되어있다. “치민”의 최초 의미는 주나라 대 오늘날의 푸젠과 저장 남부에 산재하여 살고 있으며 뱀을 토템으로 하는 민족의 후예 촌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고공언(賈公彦)이 지은 《주례소(周疏)》에서는 “숙곰(叔熊)은 푸
貊族)으로, 기원전 8세기 고조선 변방인 혼강(渾江) 유역과 압록강(鴨綠江) 중류 일대에 살아왔다.」「일찍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부터 이 지방에 졸본부여(卒本夫余)가 있었는데 졸본부여는 고조선 옛땅의 한 작은 나라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고구려가 어느 곳에서 건국했는지를 알 수 있으
貊族)을 형성하게 되었고 단군 고조선(B.C.2333년)이 세워졌다.
그 뒤에 철기문화가 들어오고 부족국가 시대로 접어들어 벼, 기장, 조, 보리, 콩, 팥, 수수 등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유목계의 영향을 받아 가축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 이후 농경이 더욱 발달하게 되니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고 생산물에 대
貊之地, 而夫餘王其中,
개본예맥지지, 이부여왕기중,
아마도 본래 예맥의 땅이었는데, 그런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진수(陳壽), 「동이전-부여」,『삼국지』, 중국 진(晉) 나라 초기.
時句麗·鮮卑彊, 度 以夫餘在 二虜之間, 妻以宗女.
시구려·선비강, 탁 이부여재 이로지간, 처
貊族)이 세운 국가이다. 압록강 지류인 훈장 강[渾江]과 그 유역 일대에는 BC 4~3세기 무렵 이후 철기의 보급으로 사회분화가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이때 맥족들은 유력한 친족을 중심으로 계곡이나 하천 유역에 거주하면서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그곳에 성을 쌓고, 그 촌락들을 홀․골․구루(溝婁)
貊)으로, 《사기(史記)》의 <흉노전(匈奴傳)> <화식전(貨殖傳)>에는 예맥으로 기록되어 있다. 맥족의 원주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위지(魏志)》 <고구려전>에 따르면 대수(大水: 漢代에 鹽難水(염난수))라고 하였던 압록강(鴨綠江) 유역에 거주한 부족과 소수(小水: 漢代에 馬水라고 하였던 혼
貊族)을 형성하게 되었고 단군 고조선(B.C.2333년)이 세워졌다.
그 뒤에 철기문화가 들어오고 부족국가 시대로 접어들어 벼, 기장, 조, 보리, 콩, 팥, 수수 등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유목계의 영향을 받아 가축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 이후 농경이 더욱 발달하게 되니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고 생산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