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그것이다. 전자는 위로부터 체제의 개혁을, 후자는 아래로부터 폐정을 개혁하고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이들은 방법은 달랐을지 몰라도 조선을 위기상황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발제문에서는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자
갑신정변(甲申政變) 발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시작.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1896년 (고종 33) 각지에서 을미의병(乙未義兵) 봉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생.
1871년 (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발생.
1875년 (고종 12)년 운요호사건 발생.
1882년 (고종 19)년 4.6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 박영효,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세운 우정국의 낙성식 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들은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閔泳翊)을 살해하고 왕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개혁정치를 실행할 계획
-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던 2000년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이후 4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에게 있어 지난 100 여 년은 전혀 정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법과의 최초의 조우라고 할 수 있는 만국공법(萬國公法) 萬國公法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첫
병인양요
1866년(고종3년)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사건에 대한 프랑스군의 침입 사건.
1866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이 박해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중 9명이 잡혀 처
4) 내재적 발전론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이 얼마든지 자력으로 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할 당시 조선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는 청,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이었다. 그런데 청은 쇠퇴하고 자국마저 큰
2. 명성황후의 인품
명성황후의 생전의 인품에 대해서는 그녀의 사후를 기록한 행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였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장영숙,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1.머릿말
오늘날 서양 여러 나라의 형편을 보면 바다에는 기선이 달리고, 육지에는 기차가 달리며, 머리 위에는 전선이 가설되고, 가로에는 가스등이 걸려 있으며, 그 조화를 폄을 다 이름하여 들 수서없다. 군사는 사해에 나가 있고, 만국과 통상하며 세계에 부강한 군대를 갖고 이웃 나라를 위협해서
임오군란은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을 약화시키고 청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청은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워 조선에서의 권한을 확대하였으며, 새로이 정권을 잡은 민씨일파는 청에 의지하는 사대당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홍장의 주선에 따라 중국인 마
Ⅰ. 갑신정변
1. 개화파와 갑신정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중국의 양명학, 훈고고증학 등 한학의 도입과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두되어 성리학은 조선 전통사회를 이끌어온 지배이념으로서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제적 피폐와 관료의 극심한 횡포에 따른 민생고 문제에 대한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