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로 들어왔던 시기를 佛敎 初傳 年度로 보는 것이 通說이다. 그러나 東晋의 支遁이 高句麗 道人(승려)에게 써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梁高僧傳』참조)는 것을 근거로 順道의 전도가 과연 初傳이었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위와 같은 불교 전래에 관한 내용을 본문에서 다뤄보고자
1. 서론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김한규 선생님은 2004년 『요동사』라는 책을 출간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김한규 선생님은 1999년『한중관계사』라는 책을 내면서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중국 학계의 애국주의적 경향을 지적하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가 '요동'이라는 역사
고구려(高句麗)의 낙랑(樂浪) . 대방(帶方)지역 경영
Ⅰ. 고구려의 낙랑 . 대방지역 경영
1. 낙랑 . 대방지역의 장악 과정
고구려가 중국 군현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한 시기는 태조왕대(太祖王代)이다. 당시 후한(後漢)의 정치적 혼란으로 변방 군현의 운영에 공백이 생기자, 이 틈을 이용
●고구려고구려(高句麗, 기원전 37년경~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하지만 고구려는 삼국시대 이전인 철기시대의 많은 국가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장수왕 이후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했으
高 [句] 麗
고구려(高句麗)는 그 선조가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朱蒙)인데, 하백(河伯)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이에 주몽은 紇斗骨城(흘두골성) 위서(魏書)와 북
高 [句] 麗
고구려(高句麗)는 그 선조가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朱蒙)인데, 하백(河伯)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이에 주몽은 紇斗骨城(흘두골성) 위서(魏書)와 북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신들의 변방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歪曲)으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는 2002년 2월부터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연속 연구공정(동북공정(東北工程))’ 이라는 국가
고구려사를 시기구분을 해보고, 고구려 발전단계에 상응한 전쟁의 기능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발전의 전략적 방향과 범위, 전쟁의 동원규모와 피정복지의 처리방법 등이 밝혀짐으로써 고구려왕의 영역 통제인 巡幸을 이해할 수 있는 전제가 마련될 것이다.
Ⅱ. 高句麗의 戰爭
동이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볼 수 있다.
북쪽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예의 언어가 있었다. 그 언어들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高句麗 - 東夷舊語 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동이의 옛말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東沃沮 -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Ⅰ. 서론
“시중에 나오는 차는 비리고 잡내가 나서 나는 마시지 못하겠드만”
어막이 없거나, 컵에 찻잎이 석여 나오는 게 싫으면 찻잎 자체를 작은 헝겊주머니에 싸서 끓이면 된다. 차를 보관하기 위해 은박종이로 밀봉하거나 독에 밀폐할 필요가 없다. 차 우려내는 도자기 주전자에 식힘 사발,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