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사
1395년(태조 4)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이 쓴 고려의 역사서
고려왕조 실록과 민지(閔漬)의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참고하고 이제현의 사론(史論)을 수록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총 37권의 편년체 사
역사서는 그 책을 수찬한 사람에 따라 관찬사서와 사찬사서로 나누어진다. 관찬사서란 왕명에 의하여 국가적 사업으로 씌어진 것으로, 이는 개인적인 동기에 의하여 개인이 쓴 사찬사서에 비하여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체재가 전형적인 역사 서술법을 따른다. 따라서 체재적인 면에서의 균형
○ 김초(김초)의 상소(고려사절요 권35, 공양왕 3년 5월)
석씨가 자기 몸만 깨끗이 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면서까지 산림으로 도망해 들어가는 것은 역시 하나의 도라고 하겠으나, 그러나 그의 화복의 설은 요망함이 아주 심합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장황한 범패․불사가 능히 요이를
퇴계의 무진육조소와 율곡의 동호문답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두 성리학자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한 글이다. 17세기 당시는 사림이 득세를 해나가던 시기였으며, 두 사람의 글 모두에서 당시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고 유교의 근본을 되돌리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다.
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사를 보면, 태조 13년 이전에는 서경에 아직 학교가 없었는데 태조 13년 12월에 이르러 서경에 학교를 창건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서경의 학교는 성과가 커서 태조는 비단을 내려 그 성과를 권장하고 또한 곡식을 하사하며 학보를 삼게 함으로써 장학에 힘
있다.
고려사 : 태조 4년 1월에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것으로 모두 37권이나 되는 방대한 역사서 이지만, 아쉽게도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정도전의 <고려사>는 뒷날 김종서가 지은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므로, 거꾸로 <고려사절요>를 통해서 정도전의 <고려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조선경국전
고려사절요」제22권, 기해25년(1299년).
(한국고전종합DB :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
이 사료가 기록될 시기는 충렬왕의 애첩이었던 시 무비가 충선왕에 의해 제거된 이후였다. 충렬왕이 가무와 잡회를 즐겼다는 기사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또한 충렬왕
고려사절요 권 18).
송염, 송분은 모두 위사장으로 무인이었으니 이들 송씨일가는 순수한 무반 가문임을 알 수 있다. 또 한사람인 홍문계는 임연의 이고 임유무의 妹夫였는데,그의 관직은 어사중승으로 그가 문반출신인지 또는 무반인자 不明이나 임유무의 친족이 주로 무인출신이고 또 충열왕 5년 정
1
고려청자
: 물 속에 하늘 빛
List
List
1. 고려청자의 기원
2. 비색 청자
3. 상감 청자
4. 청자의 쇠퇴
5. 자기의 색깔과 유약의 관계
고려청자의 기원
3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고려시대의 문집을 보아도 아름다운 고려청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문헌 상의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현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