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又玄 고유섭 (1905.2-1944.6)
미학과 미술사를 국내에 뿌리내린 최초의 미학자
인천 중구 용동에서 태어남
‘의성사숙’에서 한학의 기초를 닦음
3·1운동, 인천 만세시위에 참여
보성고등보통학교: ‘한용단’에서 문예부 활동
경성제국대학: ‘문우회’에서 다양한 문학작품
1930년 경성제국대학
2 청화백자매죽문호
이 작품은 중국 원말명초의 청화백자가 조선 왕조에 도입되어 새롭게 발전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유례가 극히 드문 초기 청화백자 가운데서도 크기나 문양, 청화발색 등 모든 면에서 단연 발군인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항아리이다. 높직한 구연부에 풍만한 어깨, 급히
우리 선조들이 그 시대를 살면서 지혜로움을 남겨놓은 것이 문화이며 삶의 모습과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여 놓은 것이 예술이다. 이것을 우리는 문화재라고 한다. 문화재는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로 구분한다. 유형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이 생활에 필요했던 부분들의 형태로 만들어 전해 온 부분이며
야나기와 한국의 근대 미술
― 고유섭의 미론을 중심으로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고유섭 이전의 한국 미술사학
2-1. 일제 관학자들의 미술사학
2-2. 야나기와 기타 외국인들의 미술사학
3. 又玄 高裕燮(1905-1944)의 미술사학
3-1. 고유섭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3-2. 고유섭과 그의 학문적 배경
3-3. 고유섭의 한
고유섭, 윤희순, 최순우, 김원룡, 김영기, 서구의 맥큔, 콤페츠 등이 일반적으로 알려 지고 있다. 상기한 사람들은 한국의 미를 애상의 미, 자연의 미 - 야나기 무네 요시 -, 무기교의 미, 寂照의 미 - 고유섭 -, 청초미, 선의 미 - 윤희순 -, 소박과 선의 미, 정적과 온아의 미 - 최순우 -, 자연의 미, 천성의미
고유섭 선생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구수한 큰맛’ 이라고 했는데 구수하다는 건 정적이지도 동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맛이다. 집을 감싸고 있는 산은 굽이굽이 능선을 움직이면서 집이 배경이 되어준다.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도 큰 길에서 큰 움직임을 주어 막다른 길에 이르게 하는데 이때도
분장회청사기(粉粧恢靑砂器)
목 차
분장회청사기란?
분청사기의 특징
분청사기의 형태
분청사기의 문양의 특징
분청사기의 문양(상감, 인화,박지,조화,철화 귀얄,덤벙기법)
분장회청사기란?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1940년경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는 이름을 붙인데서 비롯.
조선시대
고유섭 같은 화기들을 배출한 학교다. 이상은 그림을 그를 때만 마치 강신(降神) 한 것처럼 눈빛이 번쩍거렸다. 보성의 미술 친화적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은 이윽고 빛을 보게 된다. 보성고보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풍경>으로 1등상을 차지한 것이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해경은 학교
고유섭, 손진태, 안자산, 이명선, 최현배, 이희승 등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학자)들까지 대거 참여하고 있다. 『문장』이 이렇게 상호이질적인 영역을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잡지의 개방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불어 일본어 상용이 강요되는 상황에서도 조선어문학을 끝까지 고수하
고유섭 선생의 글에 따르면, 1914년 5월 이 삼층석탑이 있던 주변에서 원효대사의 비석인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었으므로 이 탑은 통인신라 686년 이전에 지어진 탑으로 그 높이가 10.2M이다.
▲ 금동미륵반가사유상
③ 반가사유보살상
"대단히 훌륭한 미륵(또는 석가모니) 반가사유상 같은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