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16세기의 정치변동은 사림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과정 곧 사림정치의 형성과정이었다. 조선은 이들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본격적으로 백성들에게 영향이 미치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한 정치를 사림정치라 한다. 따라서 사림정치를
I. 훈구세력과 사림
1. 서론
16세기 사림정치가 시작되며 붕당정치가 판을 이루기 전에는 공신들과 왕족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훈구세력이 득세를 하였다. 훈구세력의 특징은, 초기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지으며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중앙집권적 성격이지만 갈수록 권세가 심해져 점
2. 정치와 경제
1) 정치세력-사림
-태종 ;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면서 두문동 72현 세력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을 이르는 말.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
사림파는 훈구파라는 강력한 상대세력이 있을 때는 단결되었다. 그러나 선조조에 훈구세력이 무너지고 사림세력이 정권을 차지하자 사림이 자체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그러므로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로 보아야 한다. 당쟁이 유독 조선후기에만 있었던 것도 그러한
조선 개창이래 훈구(勳舊)와 사림의 대립은 일단 훈구의 승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16세기가 되면서 훈구 세력은 지방 향촌의 지지기반을 이용한 사림세력으로 인해 점점 권력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사림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사림은 혈연과 지연등을 통해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지고 동인은 북인과
서론
1. 호남 사림 형성배경
조선조는 전주이씨가 남도권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나 조선조 때 남도권은 중앙정부의 정치권에서 크게 득세하지 못했다. 또한 왕조의 반정과 사화 등 정치적 변혁이 있을 때마다 그 공훈의 중심 세력권 안에 남도인은 들지 못했다. 곧 남도인은 훈구
사림이란 원래 어의상으로 ‘사족’(士族),‘사류’(士類) 등과 동일한 의미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의 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두어 달리 쓰여 왔다. 이때의 ‘사림’은 15~16세기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훈구 세력에 상대되는
Ⅱ. 훈구와 사림에 대한 인식
1. 당파성론에 따른 훈구․사림의 이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인식
-한민족의 역사를 분열과 정쟁만 일삼아온 혼란한 역사로 규정
-훈구․사림세력을 무능한 정치세력으로 인식
-사화를 무능한 정치세력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부정적 측면에서 주목
-영향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