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는 양반지배체제가 확립되던 시기이다. 사림정치의 개막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권력을 소유하게 된 신대사족(臣大士族)과 정계진출에 실패하여 겨우 지위만 유지하는 한미사족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사족층 내부에서도 유력사족과 그렇지 못한 하층사족 · 이향사족은 배타적 관계에 놓여있었다
Ⅰ. 고대사회의 신분과 계층
1) 신분, 계급, 계층의 개념
신분
전근대사회, 법적 제도와 그것으로 인해 규정된 형식적 차별에 따라 구분되는 부류
폐쇄적, 귀속적 성격
계급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에 따라 결정된 집단
계급의식의 공유
계층
재산, 권력, 명예 등 여러 가지의 사회적 지위
3) <갑민가>가 지어졌을 당시의 사회상으로 본 작자층
갑산민은 스스로 자기 가문이 원래 갑산읍에서 좌수, 별감, 풍헌, 감관 등 향임직과 유사, 장의 등의 향교직을 맡았던 사족층 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갑산민 일가는 군역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슬푸다 내시절의 원수인의 모해
사족층의 모집단이면서 향촌사회의 지배층으로 16세기 이후 관직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는 사족과 그렇지 못한 비사족으로 분화된다.
은 유향소를 구심점으로 향촌사회의 지배층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자신들의 비방지배를 관철시켜 나갔다. 또한 이들은 군현 단위에서는 司馬所, 鄕校 등 향촌기구
사족층의 도움이 없이는 매우 힘든 일 이었다. 특히 16~17세기에 와서는 사족층의 성장으로 인하여 수령의 관치적(官治的)인 지배와 사족들의 자치적(自治的)지배가 상호 보험적(保險的)으로 이루어져 이시기는 사족들의 향촌사회 자치권이 매우 컸다. 향안(案)과 향규(鄕規)는 그러한 사족들의 자치에
사족층으로 분화되었던 때이다. (여기서 경화벌열층이란 오늘날의 서울, 그리고 그 근교를 행정적인 중심지로 하여 주도세력을 쥐고 있던 계층을 말한다) 홍원주는 영수합 서씨와 함께 경화벌열층에 해당하는 여성작가였다. 따라서 정일당 강씨와 같은 경화사족층이나 삼의당과 같이 하층사족에 속한
사족층(京華士族層)이 형성되어 여론과 학문을 주도해나갔다. 비록 정권 담당자나 경화사족층 내부에서 정치적 의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전반적인 정치구조가 배제와 차별의 양상으로 고착화된 상황은 이후 조선에서 근대개혁론의 발전을 저해한 조건이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사족층이 당시 사회를 주도하면서 유교문화라는 단일한 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그로인해, 지역간의 발전 격차도 크게 해소되기도 한다.
팔만대장경은 고려문화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유물이다. 통일성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곤한다. 팔만대장경은
사족층이 이를 주도했으리라는 것이며, 교육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가숙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촌락단위 사업의 일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중인층의 서당 참여이다. 중인층의 서당 경영은 그들의 교육 기회가 확대되고 유교적 지식이 보급되었다는 점에 집중해 기존 신분제에 입각한 사회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