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유럽公法’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는 후술하지만 19세기 유럽 국제법의 유럽중심주의를 반영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의 유입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19세기 동서문명의 폭력적 만남이라는 상황에서 만국공법이 갖는 의미는 흔히 간과되어 온 것과는 달리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19세기 후
Ⅰ. 서론
한국은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속성장을 통해 30년만에 산업화를 달성했으며, 87년에는 절차적 측면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도 성공했다. 또한 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통해 아시아 신생민주국가들 중 야당으로의 평화적 정권이양에 성공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필요성은 이미 북학파 실학자 인 박제가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
또 개항전에도 김정희(金正喜), 박규수, 오경석 등 일부 선각자들은 청 의 양무운동과 양무론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세계정세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견을 일부 청년들에게 전파하고 가
4) 내재적 발전론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이 얼마든지 자력으로 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할 당시 조선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는 청,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이었다. 그런데 청은 쇠퇴하고 자국마저 큰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한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포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
조약(강화도조약)으로, 이는 단순히 국가간에 체결된 협약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동안 쇄국일변도였던 조선이 최초의 개항을 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를 필두로 1882년 朝․美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으며, 이후 불과 몇 년 사이 여러나라들과 수교하여 1886년 이후에는 동양
3)한불조약(韓佛條約) 체결과 신교 자유권 획득
한미 수호조약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천진에 알려지자 그곳에 있던 영국, 독일, 프랑스의 외교관들도 곧 조선으로 나와 같은 조약이 맺어지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영(韓英), 한독(韓獨) 사이의 수호조약이 각각 그해 6월에 제물포에서 맺어졌
앞서 언급한 조미통상조약에서의 제1조 내용, 즉 ‘조선은 자주국이다.’ 라는 내용을 부인하고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다.’ 라는 구절의 삽입을 거절한 일을 문제 삼아 언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련의 전문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조선의 자주권을 부정하고 식민화를 겨냥한 조선의 피보호
병인양요
1866년(고종3년)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사건에 대한 프랑스군의 침입 사건.
1866년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 한다.
이 박해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중 9명이 잡혀 처
조약 체결 이전에는 중국과 여러 외국간에는 대등한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으로서는 외국과의 관계란 외교도 무역도 아니고 대체로 조공관계(朝貢關係)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지배계층(士大夫)의 의식 속에서 강하게 살아있는 의식은 중화사상 혹은 천하적 세계관이었다.
중국은 淸初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