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민지 교육의 추진기(1910-1919)
(1) 식민지 교육의 기본방침
이 시기는 일제의 무단독재의 의한 교육통제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1911년 공포된 제1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식민지 교육의 기본방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충량한 일본신민의 양성
②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
③ 일본어 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인간은 언어라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아기가 옹알이나 중얼거림을 거치면 고립된 단어나 어구를 말하기 시작하고, 나름대로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모국어에 노출되고 모국어 사용에 대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인간은 모국어
(倭學偶語廳)으로 바꾸어 학생 20명을 교수했는데 교수는 지난 두모포왜관시대 훈도였던 안신징 박재홍이 왜학훈장이 되어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역관이 되는 길은 이른바 잡학계 시취(試取)인 잡과에 응해서 합격해야 했으며 응시한 교과목이나 교재가 학생들의 학습독본이 되었을 것이다.
강화: 일어교육 강화, 일본인 교사 배치
-민족말살정책
*한국 역사와 지리과목을 일어독본과 국어독본에 포함
*교과용도서 규제, 통제: 민족의식, 자주의식, 애국심 함양 등을 고취시키는 내용 배제
*사학탄압: 사립학교령(1908)과 학회령(1908) 공포 - 사학 설립 기본금 강요
1929 - 1945
휘문고보 교사
1945 - 1950
주간, 교수,
초당
1950 - 운명
감옥 수감
시 . 유리창 발표
시문학파 동인으로 참가
유리창, 바다, 호수 등 발표
제 1시집 정지용 시집 출간
<문장>지 창간으로 다양한 시인들 등단
제 2시집 백록담 출간
정지용 시집, 백록담 재판 간행 산문집 산문, 지용문학독본 간행
독본"이 박문출판사에서, "산문"이 동지사에서 출간됨.
* 1950(49세)
6.25동란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정인택, 김기
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 (부인 송재숙씨는
70세 일기
독본』에 실린 운문을 창가화하여 불렀던 기록도 있기 때문에 당시의 국어교과서도 검토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용 도서 일람은 『한국 근대 학교교육 100년사 연구(Ⅱ)―일제시대의 학교교육―』(이혜영윤종혁류방란, 한국교육개발원, 1997) 202~224쪽의 표를 참조.
그러나
일본어만을 사용하게 하는 정책으로 발전하게 된다.
교육제도에 대한 일본의 근대화의 영향을 평가해보자면,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서 실업교육과 직업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것을 교육제도의 근대화의 시초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는 이미 조
독본의 편찬에 관계하여 군국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국정국어교과서에 대해 의의를 표명하지 않고 오히려 이에 충실한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아시다가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로는 北川知子, 「語育と植民地:芦田惠之助と「朝鮮本」」, 『植民地育史究年報』 第8號, 皓
일본어로 시인 정지용의 생가를 설명하는 설명문이 세워져 있다. 흙담을 돌아 어른 두 명이 함께 드나들 수 있을만한 공간의 싸리문 앞에 서니 앞마당과 집안 여기 저기 꽤 사람들이 찾아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눈에 보이고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 또는 혼자서 전무가용 카메라를 들고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