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년은 평소 황패를 경시하고 황패의 명성이 엄연년보다 빼어나 영천 경내는 풍년이 자주 들어 황패는 상주로 봉황이 이르니 포상을 받았다.
延年心愈不服, 適河南界發現蝗蟲, 由府丞狐義出巡, 回報延年。
연년심유불복 적하남계발현황충 유부승호의출순 회보연년
엄연년 마음이 더욱 복종하지
지기 때문이다.
2. 함길도 감사로 제수 받은 김종서
세종은 함길도 감사로 제수 받은 김종서에게 모의(毛衣)와 모관(毛冠)을 하사 했다. 일년 중 가장 추운 12월 중순에 함길도 감사 자리는 귀양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이런 혹독하고 위험한 지역에 평소 아끼던 김종서를 보내는 것은 참으
신하들 사이에서 통제사직의 개편 등 여러 갈래의 대책이 논의되다가, 2월 4일에 '사헌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게 하라"고 주청한 것이 체포로 이어졌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 27일, 28일조. 2월 4일조) 2) 체포되던 당시 이순신의 행적 묘사도 부정확하다.
지기까지의 과정, 조약이 맺어진 후 일본의 지배 하 힘들었던 사회적 모습, 그러한 사회적 악조건 속에서도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선인들의 수많은 노력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조사하였다. 이 조사내용들을 토대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일제치하의 어려운 시절동안
지기 만조공경 하인비여위우 질병내인생상사 위심마체읍불휴 작차비태리
스스로 죽을까 두려워 처와 결별하고 눈에 눈물이 멈추지 않아 처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말했다. “중경 당신은 너무 지기가 없소! 온 조정 공경은 어떤 사람이 당신처럼 불우하오? 질병은 인생의 보통 일인데 어찌 눈물을 그치
주청사의 일로 소명을 내렸던 까닭에, 기대승은 하는 수 없이 나가 수 개월 동안 대사간 자리에 있다가 곧 사퇴하고 귀향을 서둘렀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는 귀향조차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게 되니 그의 나이 겨우 마흔 다섯이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
주청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때 그는 중국의 학문과 문학에 대하여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ㆍ문인과의 교유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