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개 :통주성은 평안북도 동림군 고군영리에 위치하며, 고구려 때 처음 쌓고, 고려시기와 조선시기에 대보수한 일이 있다. 성은 고군영리 북쪽에 높이 솟은 장대봉에서 그 좌우로 각각 남쪽 평지를 향하여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 산에서 평지에 걸쳐 쌓은 사모봉식의 평산성이다. 성벽은 돌
평양
1. 평양의 대표적인 문화재
1) 대동문
- 북한의 국보 제4호
- 평양성의 여러 문 중 가장 중요하며 정문의 역할을 했던 곳임
-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치가 빼어남
2) 보통문
- 북한의 국보 제3호
- 보통강 강변에 위치하며 평양성의 서북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으로도
성지’의 이름은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 사적 제234호 아차산성, 사적 제297호 몽촌토성 등과 같이 ‘호암산성’으로 표기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 한우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성곽 발굴 작업 결과 산성지가 문화재로 포함되면서 사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최종적
평양성을 지나면서 읊은 서정시이다.
오언 율시의 이 작품은 인간 역사의 유한함과 덧없음 그리고 자연의 영원함을 대비시키면서 쓸쓸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1)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인간 역사의 유한함이 자연의 영구함과 맞물려 제시된 서경임. 쓸쓸한 서정적 자아의 심회
평양종은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 곁의 종각에 보존된 문화재로서 조선시대에 주조된 종이다. 평양종은 높이 3.1m, 너비 1.6m, 무게 13톤 513㎏이나 되는데 당시에 주조된 종들 가운데서 비교적 큰 종이다. 평양종은 처음에 대동문 위층 다락인 읍호루에 걸려 있었는데 1714년에 평양성의 북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의 남쪽기슭에
- 출토 : 성 주변에는 기단식 적석총과 봉토석실분이 대규모의 무덤 떼를 형성, 도로유적, 우물 등을 비롯한 고구려시대의 생활유적이 다수 발견.
- 성 밖의 동서쪽에 해자를 만들어 궁성을 보호.
- 성 안에는 안학궁의 흔적이 잘 남아있음.
라)청암동토성
- 위치 : 평양시 대성구역
1. 고구려의 천도
고구려의 처음 수도는 국내성이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고 중국 남북조와 세력 균형을 이룬 전성시대에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삼국 중의 하나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영역으로 등장하였던 국가. 기원전 37년 주몽(朱蒙)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남하
'아이를 배어지이다'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깐 변하여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 왕검이다. 왕검은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궁흘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하였
성이가 된 처녀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 처녀는 다름이 아닌 아랑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원한을 갚아 달라고 나타났으나 모두들 이야기도 듣지 않고 놀라 급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랑은 모든 이야기를 한 후 내일아침 나비가 되어 자기를 죽인 관노의 갓에 앉겠다는 말을 끝으로 하직인사를 한
성 소식에 선공, 수나라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전염병과 해전에서 패배, 많은 물자와 병기 노획으로 수나라는 화친을 함(598년)
612년 수 양제의 1차 침입 (살수대첩) 수나라 패배
613년 수 양제의 2차 침입 (요동성 전투) 수성전략으로 이김
614년 수 양제의 3차 침입, 서로의 전의 상실로 화친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