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앞선 연구에서 조사된 한자어 중 각 언어의 사전에서만 확인되는 三字 漢字語를 대상으로 하여 네이버 파파고(Papago)의 번역을 토대로 자세한 고찰이 가능한지를 모색해 보았다. 그 결과 한국어 사전에서만 확인되었던 三字 漢字語 중 상당수가 일본어에서도 실현 가능한 한자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밖의 한자어의 일본어 번역을 통해서는 어떠한 한자어가 한국어에 특징적인가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한편 일본어 사전에서만 확인된 三字 漢字語의 경우는 일부 한국어에서도 실현 가능한 한자어가 확인되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어 특유의 한자어였다.
이번 고찰에서는 한국어가 일본어보다 三字 漢字語의 형성이 용이한 어구성(語構成)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한국어에 한자어 부사가 많고, 일본어가 한국어보다 외래어의 사용 비율이 높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본고는 근대에 형성된 풍경 체계 속에서 당시 발견된 지역의 인문학적 자산이 현재도 적극적으로 관광자원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일본 에히메현(愛媛縣) 마스야마(松山)가 문학도시 하이토(俳都)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간 과정을 통시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근대 발간된 안내서를 통해 하이쿠의 도시로 창출되는 과정을 확인하고, 나아가 전후 ‘하이토’의 장소성을 어떻게 계승해나갔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쓰야마의 지역 안내서는 1900년대 중반부터 주로 하이쿠를 창작하는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집필되었는데, 안내서 속 명소마다 해당 장소와 관련된 하이쿠를 게재하면서 마쓰야마가 근대 문예 하이쿠의 탄생지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애초에 하이쿠 시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하이쿠가 수집되고 안내서가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성이 강한 안내서가 완성된 것이다. 본...
조경식 ( Cho Kyung-sik )한국일본근대학회, 일본근대학연구[2021] 제71권 153~165페이지(총13페이지)
1926년에 출간된 『떠도는 류큐인』은 ‘소철지옥’ 시기 오키나와인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전달해준 작품이었지만, ‘오키나와 청년동맹’의 항의로 공식매체에서 철회된 후, 오키나와 반환을 앞둔 1970년이 되어서야 다시 복각된다. 작품속에서 표현되는 오키나와의 경제적 어려움은 본토의 정책에서 기인한 것임을 주인공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1972년 본토로의 복귀를 앞둔 오키나와의 현실과 중첩되며 본토 일본인의 자각을 촉구하게끔 한다. ‘본토수준으로 핵 없이’ 반환되기를 희망했던 오키나와인들의 기대가 점점 옅어져가던 시점에서, 오키나와와 본토의 관계를 다시 되짚어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한 과정으로서 복각의 필요성이 논의되었음은 명확한 부분이다. 1967년 발표된 『칵테일 파티』 또한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흐름 속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경규 ( Lee Gyeong-gyu )한국일본근대학회, 일본근대학연구[2021] 제71권 181~196페이지(총16페이지)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의 잡지와 신문에 나타난 여성교육과 가정개량에 관한 담론을 정리하고 이러한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성해방을 다룬 신문과 잡지 기사들은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부당함을 폭로하면서 이러한 불평등한 문제들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 구성원 주체로서의 참정권과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하며, 현모양처 교육보다는 남녀평등과 인격주의에 입각한 창조적인 여성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현모양처 교육은 남성 우월 의식에서 기반한 남성 본위의 여성 교육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을 기반으로 하는 여성 본위의 교육으로 개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시대의 인습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여성 본위의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
이홍렬 ( Lee Hong-real )한국일본근대학회, 일본근대학연구[2021] 제71권 197~221페이지(총25페이지)
본고는 현대 도시경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근대건축물과 같은 근대문화공간/유산을 통해 오늘날 한국 대중들이 개인적·집단적 기억을 형성하고 연상시키는 수단이자 대상 그 자체로서 근대문화유산들, 특히 과거 일제 식민 통치와 연계된 역사적 정체성으로 인해 다각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근대건축문화유산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를 통해 과거 및 이후 세대와의 의미 있는 문화적 접점·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지를 논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과 개화기 및 식민지 조선의 근대 공간 형성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서양식 근대건축양식과 이후 파생된 다양한 건축적 변화·혼종을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의 전통적인 공간 및 일상 전반에 어떠한 변화를 주었는지를 당시 근대 건축 기술에 내재된 근대적 표준성·획일성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김형열 ( Kim Hyong-yol )한국일본근대학회, 일본근대학연구[2021] 제71권 223~242페이지(총20페이지)
유곽은 일본 에도시대에 등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창기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娼妓業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한 지역에 모아서 성매매를 하도록 하였는데, 포주는 이들 娼妓들에 대해 몸값을 지불하고 통제하면서 유곽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창기업이 번창하게 되고 유곽에 있는 창기들이 가부키나 우키요에 등의 모델이 되는 등 에도시대를 지나면서 유곽은 ‘유곽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하나의 국가적 전통문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법령을 제정하여 근대 公娼制가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해외로 진출하면서 아시아 곳곳에 일본의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일본인이 거류지에 정착하였다. 식민지를 개척한 일본인들은 본토에서 누리던 문화를 계속하여 접하기 위해 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에 일본의 문화와 제도를 이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