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1800년대 독일은 프라시아(프로이센) 절대주의 체제 하에 있었다. 당시 독일의 경제는 30년 전쟁(1618˜1648)중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또한 통일된 민족국가의 부재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공통된 과거와 보편적으로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점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없었
일제 말기보다 한결 짙게 깔려 있었을 때다. 그런 시기에 이상이 이름을 바꾼 일은 매우 파격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김해경에서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새로운 인물 ‘이상’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자연과학과 철학을 더 깊이 공부해나갔다. 스물두 살이 되자 그는 ‘나는 내가 견지하려고 하는 내 행로를 이미 그려놓고 있다. 나는 내 행로를 밟아 나갈 것이고, 어떤 것도 내가 그것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할 만큼 자신의 미래 삶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I. 서 론
일반적으로 철학사(哲學史)를 배운다고 하면 서양사상의 역사적 흐름을 배우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현대의 많은 사회,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양의 그것이 많은 이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서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또한 실제로 많
신의 귀부인으로서 1243년 경 란돌포가 사망한 후에는 1255년경 세상을 뜨기까지 로카세카에 아퀴노가의 지주로서 역할을 다한 용맹한 성품의 여성이었다. 토마스가 유년생활을 함께 했다고 생각되는 형제, 자매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사실은 조금밖에 없다. 아버지 란돌포는 먼저 세상을 뜬 아내와의 사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을 위선적으로 막아버린 생활윤리 또한 백성들의 눈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이런 때에 백성들이 생활에서 만나는 저잣거리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목민관이나 관리들은 더욱 탐욕스럽고 공공연하게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공인된 약탈자인 관
세계를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중에 있으며, 그 과정만이 현실성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론적 차원에서 이 세계를 전망한다면 이들의 논리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이전의 기독교의 전통은 하나님을 이미 완전한, 그리고 불변하는 실체적 존재자로 가르쳤기 때문에 이들 과정 철학이
인간은 스스로 파멸되고 마는 것이다. 이로써 데카르트 이래 주체의 진리성을 보장하던 신의 존재는 소멸되었고, ‘이성의 형이상학’ 내지 ‘진리의 형이상학’은 전면적으로 붕괴되었다.
인간에 의해 설정된 ‘불변의 진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과 동시에 이는
것은 이러한 기독교적 인권전통의 이면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3] 인권의 절차화
소유권, 이성, 자연권으로서 인권 사상의 한계는 인권이 국가나 법에 앞서 이미 주어져 있는 실체가 아니라 인권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대화적 과정 속에서 비로소 형성된다고 봄으로써 극복 될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항상 윤리적이고 선한 마음씨 혹은 덕에 기반을 둔 행위를 할 수는 없다. 칸트에 따르면 이런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자율성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자율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 능력으로 도덕법칙을 준수할 수 있고 외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