濊)의 언어와도 비슷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의하면, “東夷舊語 以爲 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腹有異”(동이의 옛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일종이다. 고구려의 언어와 여러 가지 일들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고, 그 성질과 의복은 달랐다.)고 하여
濊․貊․韓족 사회의 정치적인 성장을 압박하는 외적 요소로서 작용한 한편, 중국 군현을 통해 유입된 선진문물은 濊․貊․韓족 사회에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전화되는 가능성을 부과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원전 1세기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고조선사회의 외곽에서 각각
濊, 貊, 倭, 韓등 이 조공을 바침.
․ 東夷 :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 가무를 좋아했다.
․ 蠻, 夷, 戎, 狄을 통틀어 四夷라 하는 것은 公, 侯, 伯, 子, 男을 제후라 부르는것과 같다.
夫 餘 國
․ 玄菟 북쪽 천리. 남으로 高句驪, 동으로 挹婁, 서로 鮮卑, 북으로 흑룡강과 맞닿아 있다
濊)나 한강 이남의 진(辰)이 중국(한)과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 하고 중계무역의 이득을 독점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漢과 위만이 맺은 外臣과의 관계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예와 진이 한나라에게 고조선을 쳐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국력이 강성해지자 한은 고조선에 대해 두려워하였다. 더구나
사람에게 호랑이는 피상적인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 신이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호랑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호랑이는 산군(山君), 산신으로 숭배되었다. 고대 연맹국가 예(濊)에서는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後漢書》, 東夷傳, 예(濊)의 “又祠虎以爲神(우사호이위신)”
濊)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으나 예인(濊人)의 반항으로 2년 뒤에 철폐하였다. 이와 같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대립관계는 조선 장수를 살해하고 달아난 섭하(涉何)를 조선군이 보복적 살해를 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BC 109년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6만의 육군과 7천의
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
濊, 倭, 二郡 대방군과 낙랑군
에 철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낙동강 상류지역의 경상 내륙 산간지방에는 아직 야철지가 발굴된 바 없으나 고령, 거창, 함양, 산청, 합천, 삼가 등지의 고총(高塚)고분에서는 다량의 철제 무기와 갑주 등이 부장품으로서 출토되었다. 이는 그 지역에 존재하는 풍부한 철
濊)도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가 되면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이것을 무천(舞天)이라 하였다. 또 부여의 정월 영고(迎鼓), 마한(馬韓)의 5월과 10월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가 있었다.
이러한 고대사회의 축제들은 상고시대 부족들의 종교, 예술 생활이 담겨 있는 제정일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