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옥의 생애
고정옥은 1911년 3월 25일 경남 함양군 함양면(함양읍) 하동에서 고이두(高离斗)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함양의 지주였던 그의 집안은 대부호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생활이 요족한 편이었다.
고향에서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고정옥은 1918년에 함양공립보
Ⅰ. 정산종사의 학문관
1. 지식과 학문
지식 섭렵 내지 유지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을 담아놓는 교재가 우선적으로 거론될만한 일이다. 모든 지식은 서적에서 찾아내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산종사도 교단의 발전계획 중에서 우선순위로 ‘교재를 정밀히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
2) 중인계층으로 보는 견해
사설시조의 주 작자층을 조선 후기 급격히 성장한 중인계급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사설시조 주 작자층을 중인계층으로 보는 견해는 해방이후 고정옥이 최초로 언급하였다. 즉 사설시조의 작자는 ①신진중인작가 ②창곡류 ③부녀자 ④기녀 ⑤민요시창자 ⑥몰락
고정옥은 잡가를 상층인의 창작가사가 연산군의 伎樂愛好 등이 동기가 되어 기생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게 되다가 樵童들 까지도 부르게 될 만큼 광범위한 가창범위를 가지지만, 민요도 아니고 가사도 아닌 유행가의 일종으로 보았다. 고정옥, 『조선민요연구』, 수선사, 1949, 41쪽.
조윤제는 한국의 시
잡는 밑그림을 그리는 정도뿐이었다.
2.2. 1940~1950년대
1940~1950년대의 경기체가에 대한 논의는 경기체가 연구 영역의 전반에 걸친 언급이 개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기원과 형식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했다. 양주동, 조윤제, 고정옥, 김사엽 등의 학자가 활동했던 시기이다.
고정옥), 가사의 하위 범주로 보는 견해(조윤제), 민요로 보는 견해(이병기), 독립된 장르로 보는 견해(정재호, 김문기)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1980년대 이후는 대부분 잡가를 독립된 문학양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개별 양식으로 독립성을 인정하는 경
고정옥은 『조선민요연구』에서 상층인의 창작 가사가 연산군의 好樂愛好 등으로 인해 유흥의 거리까지 가고, 기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초동들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잡가를 연산군 이후 상층의 작품이 하강한 문학의 현상으로 파악한다. 김동욱은 잡가가 병자호란 이후 가사가
고정옥 교수는 ‘노동 과정에서 내는 무의미한 두서너 음절의 소리가 곧 노래로서, 민요의 최초 형태’라 하였다. 그리고 조향 교수는 원시 민족에 있어서 노동제전시(예술)가 혼연히 융합된 것을 trimity라 하고, 무의미한 율어(민요) 사이에 실사가 들어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다. “노동의
Ⅰ. 가사(가사작품, 가사문학)의 기원
1. 고려장가 특히 경기체가에서 기원했다는 설
고정옥,정형용,양염규,조윤제,정병욱,정익섭,장덕순,정재호 등의 주장으로 고려장가의 소멸시기와 가사의 발생시기가 근접한다는 점, 두 쟝르가 모두 사물이나 생활을 나열, 서술한다는 점, 두 쟝르의 작자층이
2. 가사의 기원
가사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며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주장들은 각각 가사의 기원을 고려장가, 시조, 악장체, 한시, 교술 민요로 꼽는다.
2.1 고려장가 조윤제, 고정옥, 박성의, 정병욱, 정익섭, 이동영 등
고려장가의 형식이 파격화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