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정치목적 욕구를 위해 100년이 넘도록 치밀하게 연구를 했었기 때문에 60년대 이전까지 이렇다할 관심도 연구실적도 없었던 우리로서는 침묵만이 최선의 자기방어 수단이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말에 공감할 수가 없다. 60년대 이전까지가 그랬으면 지금은?
Ⅰ. 서론
근세의 일본과 조선은 대등 외교 관계였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강호 말기에 국학의 서민 상류층 보급과 때를 같이하여 고대사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비역사적 사실인 신공 왕후의 삼한정벌을 근거로 조선은 본디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
김석형, 조창손과 함께 호흡하고 살며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출소 후 갈 곳이 없던 비전향장기수 조창손과 김석형은 이북출신의 주민 운동가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신이 처리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는 성향을 보이며 마을 사람들 속에서 차차 사회생활에 적응
대학교제자인 북한의 저명한 역사학자 김석형은 그 국가들을 한반도의 삼한과 삼국 사람들이 건너가서 세운 분국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론”은 임나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했다는 반성을 하고 있던 일본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2) 일본서기
김석형이다. 그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사에 대해 반대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가 반론의 단서로서 들고 있는 것은 삼한. 삼국의 주민들이 계속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주하였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거기서 소국들을 세웠고 이들 한국 계통의 소국들은 한반도에
김석형이 주장함
한일 양국의 고고학적 유물에 근거를 둠
‘조선식 산성’ ☞ 한반도계통의 분국들이 정치,군사적 거점을 영위하던 유적
임나일본부는 야마토가 기비 지방의 임나소국에 설치한 지배기관이었음
한계 ☞ 관련 사료의 사실을 일본열도에 국한함에 따라 한반도 내의 가야사를 포기하는
김석형, 「고대 한일 관계사」, 한마당, 1988, p. 301~356
고대 한국의 선진적인 문화가 일본의 후진적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의 언급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일본의 신화들을 한국의 그것들과 관련시키려는 적극적인 시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임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