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책(時務策) Ⅱ - 유교정치론(儒敎政治論))
① 성지(聖旨)로써 판단하여, 요해(要害)를 택하여 강역(彊域)을 정하시고, 토인(土人)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는 자를 가려 그 방수(防戍)에 충당토록 하시고, 또 그 중에서 2, 3인의 부장(副將)을 선임하여 통령케 하시면,
乞將此兩虛, 斷於宸衷, 擇
율곡의 경제사상을 큰 주제로 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율곡의 경제사상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I), 그 다음에 율곡이 저술한 책을 통해 그것에 나타난 율곡의 경제사상(II)을 살펴보겠다.
I. 시무책과 애민정신, 양민과 교민의 조화, 생산, 분배, 소비의 원리를 중심으로 한 율곡의 경제
시무책(시사논문), 습자, 국어, 설문, 삼창, 이아 등을 과하되 산수와 시무책은 필수 그 외는 선택적이었다. 즉, 여가가 있으면 학습케 했다. 전공과목으로서의 경학은 ① 소경(상서, 공야전, 곡량전), ② 중경(주역, 모시, 주례, 의례), ③ 대경(예기, 좌전) 등으로 3분하고 소, 중, 대경 중의 각 경서를 각각
시무책에 문익점(文益漸)의 공로를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향리에 사당을 세워 봉사케 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조에는 길재(吉再)의 학덕을 기려 그의 고향인 선산에 길재사(吉再祠)가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사우 설립의 경향은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발흥과 더불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커다란 변모를
시무책(정책논문)을 논술하였다. 당시 과거제는 문장분야인 제술업, 유학경전 분야인 명경업, 그리고 복업 등의 잡업(기술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에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승려들을 위한 승과는 광종이 과거를 처음 도입할 무렵부터 시행되었다. 광종은 승과를 통해 부처의 제자인 승려들까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에 임명하는 등 개혁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이 부분에서 볼 점은 진성여왕의 업적이 아니라 바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나타내어 사실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당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후백제나 후고구려 같은
시무책(時務策), 조선시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통해 평가해보면, 우리나라의 정책관리의 수준이 비교적 높았다고 하겠다.
공업사회의 정부의 기능은 적극국가로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정부는 급격한 사회변동에 대응하여 각종 공공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한다. 정부의 정책관리는 그 폭이 넓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6두품이라는 출신의 신분적 한계와 난세를 비관했던 것이다. 그 후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 상소의 동기를 보면 이이의 상소는 왕의 구언교지에 따른 것이고, 이자건, 이황, 최익현의 상소는 자발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상소가 모두 나랏일의 방향을 담고 있는 시무책을 적은 상소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또 상소의 형식을 보면 이이의 상소는 만언봉사이고 최익현의 상소는 차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