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거리외교를 통해 서로 견제를 유도하려는 고종의 노력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2. 운요호사건과 개항
일본은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 반한감정을 고취, 대규모 파병준비를 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Ⅰ. 한국근현대사와 운요호사건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
사건(중국인의 선교사 살해사건)으로 자강운동 종말
2. 청의 군대
· 만주 팔기군과 지방 중심적인 경찰군(綠營)
· 지방군: 1952년 증국번이 조직한 호남군에서 유래
· 해군: 남양, 북양, 광동, 복건함대
3. 일본의 국내사정
. 200년간의 德川幕府 쇄국정치, 1853년 Perry의 개항요구로 포기
. 1871년
대원군은 10년이라는 짧은 집권기간 동안 많은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 정책들은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고, 이전의 집권자들도 항상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제왕도 해결의 대안을 내놓거나 단호하게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기에 대원군의 결단력 있는 추진은 개혁이라
사건.
▶ 1조 :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청나라의 간섭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
▶ 2조 :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고, 2개 항구의 선정은 일본의 임의에 맡길 것.
→ 동해안에는 원산이, 서해안에는 인천
운요호사건 발생.
1882년 (고종 19)년 4.6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언.
1)외척 : 민승호를 비롯하여, 민규호, 민겸호, 민태호 등 을
이․호․병조 등 중요한 곳에 배치
인사․재정․군사․치안 및 사법 행정 등 요직을 차지함.
2)조대비의 조카인 조영하 등 대원군에게 중용되지 못한
Ⅰ. 서론
쇄국에서 개국으로의 전환이 자율적인가 타율적인가는 그 후의 대외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내재적인 개국론이 고립된 상태에서 개국은 대일 수교의 경우에는 무력적 압력에 의해, 대미수교의 경우에는 청국의 종주권 압력을 빌려 모두 타율적으로 밖에 될 수 없었다. 문제는 식민지로
서구열강의 근대적 무기 앞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은 무력하였고,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때까지 독자적인 문화권과 생활권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사회에도 서양세력이 침입하였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 해안에 대한 탐사와 측량에 나섰으며, 때로는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
운요호사건 ~ 갑신정변기
우리나라는 운요호사건 이전에도 미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했지만, 버텨냈다. 즉, 쇄국주의를 유지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1875년에 일본이 6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왔고 우리 육군은 이에 경고로 함포사격을 했다. 이에 일본군은 대응사격을 실
임오군란은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을 약화시키고 청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청은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워 조선에서의 권한을 확대하였으며, 새로이 정권을 잡은 민씨일파는 청에 의지하는 사대당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홍장의 주선에 따라 중국인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