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출성 반대에 따른 화친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러다 보니 청측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한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하였고 김상헌이 여기에 해당되어 심양에 갔다 옴으로서 그러한 이미지가 완성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김상헌이 척화론에 있어서 최명길과 통한 점이나 김상헌 자신이 서인이라
척화론의 주장.
1. 명과의 2백 년 넘게 쌓아온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2.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던 명나라와의 의를 버릴 수 없다.
3. 화친을 하더라도, 먼저 싸우고 난 뒤에 하자.
6. 성곽의 증축·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20여 종의 물품을 세폐(歲幣)로
Ⅰ. 서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김상헌의 척화론과 최명길의 주화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하고 오랑캐를 섬길 수 없다는 척화론은 명분을 중시하는 입장이었고, 청나라와 화친하여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주화론은 현실에 입각한 입장이었다. 45일간의
Ⅱ. 본론
척화론과 주화론으로 나뉘게 된다. 청에서는 조선에게 점점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고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 등으로 인해 척화론이 점점 입지가 강해졌다.
3.병자호란
결국 이에 청나라는 청나라 태종이 직접 12만의 군대를 이끌고 1636년 조선을 다시 침입해 온다. 당시 조선은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
척화론
청의 군신 관계 요구에 조선 조정은 두 파로 갈린다. 한쪽은 주화론을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척화론을 주장한다. 주화론의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 척화론의 대표적 인물은 윤집을 들 수 있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 즉 척화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해 온다. 이것이 병
척화론(척화론;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서는 조선의 오랜 우방 국가로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과 주화론(청의 문물이 발달함에 따라 그 문화를 받아들이자)이 치열한 이념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현
Ⅰ. 조선후기의 시대상황
1. 대내외적 상황
호란의 참상을 겪은 조선사회에서 청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반청인식이 강하게 성장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의 척화론(주전론)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된 반청인식은 병자호란 이후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굴욕감에 대한 복수설치를 표
싸우자는 김상헌의 척화론. 청나라가 조선에 던지는 화두에 조선은 이 두 가지 관점으로 그들을 상대한다. 화친론은 명분이나 명예를 배척한 채 철저히 실리에 근거한다. 반면, 척화론은 국가적 명예와 승전에 대한 가능성에 근거한다. 영화 내내 인조는 첨예한 대립 사이에서 두 가능성을 저울질한다.
척화론(斥和論:강화를 배척, 즉 싸우자는 주장)이 대두하고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되어갔다.
인조 14년(1636년),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왕자 대신 및 척화 주장자들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 다시 조선을 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 몽골, 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