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성립 등이 그것이다.
아직 좌우익 노선의 분립이 뚜렷하지 않았던 시기에 일어난 3․1운동을 공화주의를 지향한 부르주아계급이 주도한 그야말로 거족적 운동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1918년 결성된 이동휘 중심 한인사회당의 존재에 주목하는 경우 3․1운동의 결과 성립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직과 이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민중들은 이미 3·1운동과 외교독립활동 과정에서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민족운동의 한계를 인식했다.
셋째, 당시
해방 직전 중국공산당의 한국문제에 대한 구상은 1945년 8월 11일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조선의용군에 내린 명령을 통해 잘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중국 및 조선 경내에 진군하여 싸우는 소련 홍군에 배합하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나는 명령한다.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이
임정에게 큰 충격이자 뼈아픈 교훈이었다. 중국의 지원을 받는 한편 미국의 승인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임정으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소련이란 복병을 만난 것이었다. 즉 한반도에 인접한 소련지역에 한인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면 임정의 몰락이 초래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당혹감이었다.
동맹, 동경조선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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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1920년대의 문화통치
1919년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민족운동이 발전.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확산. 레닌 지도 하에 코민테른은 제국주의국의 공산주의 혁명운동과 식
Ⅰ. 서론
1942년 내외정세의 변화와 주체적인 인식에 근거하여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3단체가 임정에 참여하였다. 민혁당은 내외의 조건 변화를 계기로 임정을 개조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만들겠다는 임정 개조의 논리하에 임정에 참여하였다
동맹측도 임정과의 연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1941년 1월 독립동맹의 전신인 華北朝鮮靑年聯合會가 결성된 이래 독립동맹이 실제로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항일혁명조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동북 조선의용군,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미주 조선 각 혁명단체 등이
민족혁명당이 모두 통일전선을 추구하는 가운데 탄생한 정당들이었다. 1939년에는 통일전선이 더욱 구체적으로 추진되어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의 우파 3당과 민족혁명당(김규식 김원봉).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조선청년전위동맹(신익희).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Ⅰ. 서론
식민지 민족해방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북민중들 스스로 신화로 생각하는 여러 가지 일화들은 쌓이고 쌓여 이북민중들의 집단적 가치관의 원형질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이 김일성 주석 개인의 성공담이나 건국신화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누군가 대신 꾸어주는 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