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향약의 개념
향약은 두래와 비교하면 그 범위가 면단위의 지역사회이었다는데 특징이 있지만 두레와 같이 지연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직접 참여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향약은 어느 경우에나 실천덕목을 생활강령으로 한다는 사회교육적인 의미가 강하였다. 향약의 기본이념은 백성들을 교화하여
3. 읍성의 구조
읍성 안에는 고을의 기본적인 건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관아와 객사, 관원과 백성들의 집, 시자오가 여인숙 등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향교가 읍성안에 있기도 했다. 관원들이 정무를 보는 건물을 한데 묶어 ‘관아’ 또는 ‘공해’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도 했다. 고을
Ⅰ. 서론
조선 태조는 1392년 즉위 후 민심의 안정을 위하여 국호를 처음에는 고려라 하였고 수도를 그대로 개경에 두었으며 국가제도·풍속·언어 등 모든 면에 걸쳐 고려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다 동년 12월에 국호를 정식으로 조선으로 정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정치조직은 고려말기의 것을 토대
향청제도인데, 향청은 조선초기의 유향소를 일시 페지하였다가 이를 ‘향청’으로 개칭하여 공인하게 된 지방 대표 기관이었다.
두번째는 향약제도인데, 향약은 조선 중기 이후 지방의 양반, 토호, 유림등의 상류 계급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수행된 교화 운동으로써, 자치 운동의 일면을 지니고 있다.
향청과 집사청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향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고, 집사청은 제사에 나갈 집사자들이 대기하면서 재계를 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향청(鄕廳)의 주도권을 위협하는 가운데 그들 사림들은 관권과 결합하여 서당을 설립하고, 수령을 직접 서당에 초치(불러서 이르게 함)하여 향민들을 대상으로 강회(講會)를 열고 상벌을 시행하기도 하여 향촌기반 구축에 부심하였다. 관변측(官邊側)으로서도 향교와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통제에 한계
향청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사장보다는 유교경전 공부인 경학을 중시했고, 유학의 기본정신이 수기치인에 있다고 믿었다. 자연히 도덕적 수양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사림이다. 사림세력은 성종때에 대거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훈구세력의 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향청 사이의 힘겨루기 때문에 그리 된 일이라니까요. 마음? 사람 마음이야 그 속에 뭐가 들어앉았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에이,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p172)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변부사가 금주미주천인혈 하던 향리들을 처벌한 것과 춘향의 죽음이 나타난다. 특히 변부사는 어사와의 대화에서 죽
향청, 육방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作廳, 군장교의 將廳, 회계사무를 관장하던 公須廳, 죄인을 가두는 獄, 노복들의 거처인 관노방 등 많은 관아시설이 위치해 있었다.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1991년 이후 계속된 발굴 결과, 관아시설물군은 크게 세 번에 걸쳐 건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다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