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 의생활
조선인 여성노무자들이 가장 많이 간 후지코시 공장과 마쓰비시 공장, 누마즈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후지코시 공장에서는 작업복과 모자를 쓰고 회사 수첩을 윗옷 주머니에 넣은 채로 일을 했다. 미쓰비시회사로 동원된 전남출신 여성노무자들은 도덕 공장에서 작업복과
Ⅰ. 서론
1.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 재일교포, 한국인의 생각
평소 흔히 접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이라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단어만 보면 재일조선인은 북한계 재일교포를, 재일한국인은 남한계 재일교포를 뜻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
Ⅰ. 일제시대(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노동쟁의
후쿠오카현 飯塚市에 자리잡고 있는 아소상점은 麻生太吉이 1918년에 설립한 회사로서 1932년에는 자본금 1,500만 원에 6개 탄광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소는 三井이나 三菱에 비하면 적은 규모이지만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견의 탄광이다. 창업자인 麻
Ⅰ. 1910년대의 정부수립운동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쟁에 휩싸인 러시아와 중국은 우호적이었던 한인정책을 철회하였다. 그 결과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항일 민족운동을 이끌던 노령 연해주의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북간도의 간민회 등이 이 시기를 전후로 해산을 당했다.
전쟁이 발
Ⅰ. 1910년대의 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에서 박용만 등이 제기한 ‘정부’수립론은 국외 독립운동기지화의 핵심 거점인 노령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64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1910년의 ‘합방’까지 20여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황무지 개척과 러
재일’의 삶이 이어졌다. 시집 ‘지평선’ 은 1950년부터 1955년에 걸쳐 쓰인 시들의 모음집이다. ‘지평선’이라는 제목은 희망과 망향의 심정을 담은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1949년 8월 김시종은 일본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재일조선인 운동의 조직 활동에 뛰어든다. 한편 그의 시 창작은 1950년 5월 26일
이듬해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36년 8월 ‘정치론의 한 토막’이란 글을 통해 사상전향을 밝히고, 1938년 1월 친일 사상단체인 綠旗聯盟에 가입, 주저『조선인의 나아갈 길』을 출간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역사에 대한 반성,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朝鮮人의 길은
재일 한국인(在日韓國人, 일본어: 在日韓国人 (ざいにちかんこくじん)) 또는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 일본어: 在日朝鮮人 (ざいにちちょうせんじん))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다. 재일본 한국교포는 일제 식민지정책의 산물로서 일제강점기에 도일(渡日)한 한국인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1910년 8월29일)한 이후 재일조선인은 숫자가 급증한다. 1911년 2527명, 1915년 3917명이던 것이 1917년엔 1만4502명으로 사상 처음 1만명을 넘어섰고 1920년 3만189명, 1930년 29만8091명, 1940년 119만444명으로 그 수가 폭증했다. 1945년 8월 일본 패전 직전엔 무려 236만5263명에 달했다. 당시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동포, 재일교포, 재일코리안 등 다양한데 이것은 국내에서 그들을 규정하며 주체를 강조하는 말이다. 자이니치는 그들이 ‘일본사회’ 안에서 불리는 명칭으로 재일(在日)의 일본식 발음이다. 내부자의 시각에서 본 그들이 아닌 좀 더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그들의 삶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