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1896년 의병(일명 ‘을미의병’)이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해 복수보형(復讐保形:시해당한 왕후의 복수를 하고 단발하지 않은 채 신체를 보존한다는 뜻)과 반러배일(反露排日)을 내걸고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상찬, “1896년 의병운동의 정치적 성격”,
의병방식으로 항전하고 있던 사실에 주목하여 말기의병 시기를 설정한 경우이다.
국사편찬위원회, 「6. 항일의병전쟁」,『한국사』, 1999년, 515쪽
2.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⑴ 을미의병 乙未義兵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시해사건과 단발
義兵활동과 더불어 구국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이동녕이회영정순만여준 등의 민족운동가들은 1906년 4월경부터 북간도의 요지인 용정촌을 독립운동기지의 한 예정지로 잡고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이 서숙에서 중점을 둔 교
의병(義兵)을 일으켜 순국(殉國)한 선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본관(本貫)은 언양(彦陽)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학문으로 유명했던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처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573년(선조 6)에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를거쳐 1578년에 임실(任實) 현감(縣監)을 역임한 후
의병(義兵)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때 6천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陰職)으로 도사(都事)벼슬을 제수 받았다.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1910
1914년 11월 26일 도사(都事)벼슬을 했던 김유정
의병가(義兵歌), 시대 비판적인 시조 등
(3) 새로운 노래와 시의 시도 : 창가, 신체시 등
- 18세기 말에서 1900년대까지의 이른바 개화기는 심각한 역사적 격동기였으므로, 형식의 변화나 세련보다는 거기에 담기는 시대정신이 더 급박하였다. 독립신문의 애국가류, 대한 매일 신보의 우국가류, 의병 가
의병운동(義兵運動) 및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실천자로서, 반외세 민족운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한국근대민족운동은 이들 세 흐름에 의해 그 기반이 형성되었고, 국권피탈 이후 반일독립운동은 이 세 흐름의 민족운동이 국제적 환경과 독립운동의 조건 변화에 대응해 간 과정이었다고 해석
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으로 발전하였다. 한국학술정보(주), 『저항과 지향』, 박진철 지음, p15
척사위정운동은 조선왕조의 전제주의적(專制主義的) 정치체제, 봉건적(封建的) 경제체제, 신분(身分) 차별적(差別的) 사회체제,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체제를 유지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하
의병(乙未義兵) 봉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발생.
1871년 (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발생.
1875년 (고종 12)년 운요호사건 발생.
1882년 (고종 19)년 4.6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언.
1)외척 : 민승호를 비롯하여, 민규호, 민겸호, 민태호 등 을
이․호․병조 등 중요한 곳에 배치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