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필요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절실해졌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이상향의 제시에 앞서 과거를 통한 즉, 역사를 통한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근대에 들어와서야 생각하게 되었다는 민주주의 사상의 커다란 윤곽은 이미 공자에게도 존재했었으며
공자가 고도의 부활을 추구하였고 사람들에게 유덕한 「선왕의 도」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 견해이다. creel은 공자가 고도를 자신의 사상적 근원으로 시사한 적도 두 번 있었고 과거와 비교하여 현재를 자주 비난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것은 당시 정권을 쥐고 있
공자는 난신적자의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개개인의 선한 마음을 호소하여 인(仁)의 사상을 구현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는데, 노나라에 관계된 기록이 쓰여진 『左傳』을 보면 양공 29년 (BC 544)에는 오나라의 公子 계찰(季札)이 노나라를 방문하여 여러
공자에 대한 종래의 설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새로운 상의 공자를 제시한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creel의 견해를 중심으로 유가 발생과 한왕조대 이후의 유가의 변질, 개혁가로서의 공자, 다른 학파와 유가의 대비, 유교와 서구 근대 사상 등을 살펴보았다. creel은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 영향을
사상가가 출현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이 필연적인 역사적 사실 앞에 출현한 사람이 바로 공자이다. 공자의 정치사상은 從周종주, 즉 주나라의 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공자의 이상은 서주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나라의 정치제도를 변형, 발전시켜 혼란스러
공자사상을 바라봄에 있어서 구체적인 禮의 행동 지침까지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禮란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모습이었을 뿐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논어와 같은 고전에서 불변하는 인간관계의 본질 을 다룬 것만을 구별해 낼 수 있
나온다. 민주체제란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정권과 치권 즉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되어 있으며, 모든 국민은 독립적 개체로서 평등한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회구조를 의미한다. 공자 이래 유학이 추구해온 정치이념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고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사상이었다.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공자는 기원전 552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라고 분류되는 중국의 혼란기였다. 춘추라는 시대는 공자가 집필하였다는 『춘추』라는 책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시기적으로 기원전 722년에 시작해 481년에 끝나는 242년에 걸친 시기이다. 주왕조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제후
공자가 편집하여 개정한 것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B. C.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으로부터 B. C.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 건을 기록하고 있다.
춘추와 전국의 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위·조의 3家가 晉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 C.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