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에, 유신 이후에는 민주화나 사회 비판적 노래에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70년대 많은 금지곡이 가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듣는 이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나왔다는 것. 송창식의 ‘왜 불러’는 사회저항 가요가 전혀 아님에도 경찰의 장발 단속에 저항하고 정부 정책에 반
근대화 정책이 초래한 사회 전반 구조적 모순의 심화, 이에 따른 민중 생존권의 위협, 노동자와 농민 운동과 같은 민중 운동과 민중 의식의 성장, 이에 대한 지식인들과 문인들의 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60년대 이래의 민주화의 좌절,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도시 빈민층의 증가, 유신 헌법(19
근대화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이자 이 작품에서 배경이 되는 다이쇼 시대는 민중세력이 대두되면서 대중문화가 발전한 시기다. 러일 전쟁이후 의무교육이 철저하게 실시되어 일본 국민 대다수가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러일 전쟁은 제1차 세계
문화적으로 교류해온 역사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방면은 경제 분야인데 향후 미국을 체치고 세계의 슈퍼파워로 군림할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중국과 바로 인접한 대한민국이 그 기회를 살려 발전을 도모해야 함은 지당한 명제이다. 이러한
전쟁에 기반을 둔 일본의 경제 성장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인 상승국면에 들어서고, 1970~1980년대 절정기를 이루며 일본을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한다. 이때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 바람, 즉 일류(日流)가 불었고,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일본 대중문화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그
이는 중국인 특히 신 지식층에게 구국을 위해서는 군벌과 매국노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게 했다. 근대의 자아에 눈떠서 전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절규와 민중과 함께하라는 호소와 그리고 권력을 타파하자는 운동이 곧 이어서 젊은 청년들의 넋을 흔들면서 1919년 5.4운동을 맞이한다.
집단 심리적 바탕에서 1960년대 초반에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한국사회를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구동시킬 수 있었다.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를 통해서 채우고자 했고, 이런 것을 방송, 신문 등을 통해 하려했고 그중에서도 영화를 통해 하려했다. 대중의 일반적인 근대화 욕망과 여화인의 영화에 특별한
이후부터이며,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은 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50년대 문화정책은 전쟁의 소용돌이와 이후 전후복구사업과 반공주의 속에서 어떤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형태를 지니지 못하였다. 이런 양상은 1970년대초까지 근대화라는 경제성장의 논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일
대중의 역사적 사명과 잠재력을 강조한 이 논문은 모택동의 인민주의적인 성향을 예고한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의 전통가치를 타파하고 청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각성을 통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 당시의 모택동의 사상은 1949년 이후문화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개조운동으로 발전하였
문화예술로서가 아닌 전쟁 승리를 위한 선전 선동의 도구로 악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우리의 연극을 탄압하여 1930년대의 순수를 상실한 채, 강제적으로 정치권력에 끌려 다니게 된다. 광복 이후부터 40년대 말기까지의 연극은 친일극 활동의 반성과 식민지적 잔재의 청산 및 새 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