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만 해도 음악을 오늘과 같이 한낱 오락적인 기능이나 순수예술의 장르로만 생각하지 않고 풍속과 민심을 바꾸고 국가의 성쇠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적극적인 음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를
세종대왕의 음악
음악에 관한 세종의 주요업적은 모든 음 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다. 그의 음악적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몇
실록의 중립성
-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조차 볼 수 없었으며, 국가기밀문서로 취급
- 실제로 몇몇 왕들은 실록을 보고자 했지만, 사관과 신하들이 목숨 걸고 막아냄
▣ 국조보감이란?
- 세종대왕 때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어 하자, 신하들이 달래기 위해 편찬
- 실록을 보고 싶어 하는 몇몇
<조선왕조실록 요약_1>
조선왕조 실록이란?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 2,077책으로 이루어진 기록물
· 한 책의 두께가 1.7cm인데 아파트 12층 높이
·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생존했을 때 만들어지지 않고, 승하(세상을 떠남)하고 난 뒤에 편찬
·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담당하던 춘추관에서 실
Ⅰ. 조선시대의 왕권
조선시대의 관료는 문관과 무관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밑에 행정실무자인 관리들이 있었다. 문관과 무관은 정책입안자층인 양반이었고, 기술관․서리․향리 등은 행정실무자층인 중인이었다. 문관․무관 중에서도 정치를 주도하는 관료들은 문관이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실록의 보관을 위해 특별히 세워진 사고(史庫)에서 보존되었다. 사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이었고, 조선초기의 사고운영은 고려시대의 예를 그대로 따라 내사고인 춘추관사고와 외사고인 충주사고 두 곳을 세워 운영하다가, 세종대에 이르러 실록의 복본을 원본을
조선 전기(근세)의 음악
* 시대 구별 : 조선시대의 음악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조 선전기의 음악은 1392년부터 1592년까지의 약 200년간으로 본다.
* 시대 배경 : 조선시대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구축되 었
맹사성은 오랜 음악 경륜과 문화와 전통을 바라보는 유연하고 참신한 사고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자신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핵심적인 생각 몇 가지로 세종 시대의 음악정책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음악문화의 조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소박한 성품의 청백리 맹사성으로서 뿐만
실록을 편찬하는데 가장 근간이 자료는 시정기(時政記)와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이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종합 정리한 것으로 세종 16년(1434년)에 창시한 것이다. 그때까지 정부의 여러 기관에서 시행한 안건 중 후세의 귀감이 될만한 것을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관하던 것을 이때부터
세종의 휘(諱)는 도요, 자(字)는 원정(元正)으로 1497년(태조 6)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전주이다.
아버지 이방원(1367-1422)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향처(鄕妻)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다섯 째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