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인협회의 회장이 된다. 1941년 말에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각지를 순회하며, 친일 연설을 하고 다닌다. 1943년 조선문인국보회 이사로 <징병제도의 감격과 용의> <학도여>를 써서 학도병 지원을 권장한다. 1945년 사능에서 일본의 패망을 접하고 상경, 재만혁명동지회를
문인과 그들의 작품들은 국문학사에서 감추고 싶은 치부에 해당한다. 일제 강점기의 문학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백철에 의해서였다. 백철은 ‘조선문인협회’와 같은 어용 문인단체에 의한 일어화 촉진 등을 근거로 1941년 말부터 해방까지를 ‘암흑기’로 규정하였다. 그는 당시의 문학사를 ‘브랑크
금지
→ 문학의 암흑기
1945년 8월 15일 광복
- 문인들의 문단 설립, 문학운동
2.해방 직후 조선 문단의 전개
좌파의 조직활동
① 조선문학건설본부
②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③ 조선문학가동맹
우파의 조직활동
① 중앙문화협회
② 전조선문필가협회
③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문인화(南宗文人畵)류의 수묵화가 주가 되었으며, 또한 50년대부터는 서양화법(西洋畵法)의 도입이 뚜렷해져 신구(新舊)가 뒤섞인 온건파를 비롯하여 철저한 추상파까지 탄생하였다.
한편, 서양화는 19세기 말경부터 한두 사람의 서양인 화가의 내한(來韓)이 있었으나 별다른 반향이 없었으며, 1908년
조선의 역사적 발전의 전 과정은, 지리적인 조건․인종적인 골상․문화 형태의
외형적 특징 등 다소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외관상 특수성이 다른 문화민족의
역사적인 발전 법칙과 구별되어야 할 독자적인 것은 아니며, 세계사적인 일원적 역사
법칙에 의해 다른 제 민족과 거의 궤적인 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이 일제에 검거되는 ‘조선어 학회 사건’ 이후 우리말과 글은 더욱 침체기를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절필하거나 지방에 칩거했던 많은 문인들이 조선문학건설본부 등의 문단을 설립하여 다양한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직후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
Ⅰ. 개요
조선시대는 우리 나라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며 제일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던 시기이다. 북종화, 남종문인화, 남종산수화, 진경산수화를 비롯하여 사군자, 도석화, 초상화, 풍속화, 춘의도, 영모초충도, 궁중장식화, 의궤도, 세화(歲畵), 지도그림, 무속화, 민화 등 수
협회전람회와 22년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한국의 전통회화가 조선화로 지칭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대신 동양화로 부르게 하였다.
한국화는 종이나 비단 위에 먹이나 물에 녹는 안료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모필로 그리며, 동양적 자연관과 가치관에 바탕을 둔 회화관과 화론에 입각하여 주로
문인 등 사회 저명인사들의 후원 (이익단체 → 사회운동가의 장)
4) 발명학회가 조선 과학 운동의 핵으로 발돋움
해방으로 열린 공간은 매우 역동적
사상, 이념,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
해방직후 과학기술을 재건하고자 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
→
조선 초기기를 비롯해 중기의 도화서 화원들의 미법 산수가 전해지며, 후기에는 남종화가 유행하면서 문인화가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➄ 남종화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남종문인화라고도 하며, 문인화라고도 부른다. 인격이 높고 학문이 깊은 문인들이 수묵과 엷은 채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