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17세기에는 한백겸(韓百謙), 이수광, 유형원 등이 국가 체제를 개편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개혁의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특히, 한백겸은 토지 소유의 지나친 편중을 개탄하고, 농민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한편, 민생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대
고취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의 사회변화와 외래적 영향으로 실학이 대두했고 실학의 논의는 더 현실문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학에도 반영되기 시작하여 기존의 정통적인 도덕적 역사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역사관의 변화를 다음 두 인물-한백겸, 신경준-을 통해 알아보자.
1. 생애와 학문경향
한백겸은 자가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본관은 청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훈신의 집안으로 내려오다 사람으로 전화한 집안이었다.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민순에게서 학문을 배운 한백겸은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부상(父喪)을 당하고 4년
한백겸의 건의에 따라 선조가 시행.
(2) 대동법이 시행되게된 배경은?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防納:代納),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貢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의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
한백겸 : 도학파의 일반적 관심을 넘어서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학문 방법으로써 조선 사회의 자기 인식을 추구함
-이수광 :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경험과 당시에 접촉한 문물에 근거하여 「지봉유설」을 통해 서양을 포함한 세계 지리를 비롯하여 「천주실의」
과중한 것이었습니다.
2. 대동법
조선시대 선조 이후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이전까지의 호 단위로 부과했던 조와는 달리 전결의 양에 따라 세 부과.
(1) 누가 시행했는가?
1608년 영의정 이원익과 한백겸의 건의에 따라 선조가 시행.
(2) 대동법이 시행되게된 배경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 조선계승의식과 한계승의식 2원적으로 파악된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3조선계승의식이 비판되었다.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에서 조선계승의식을 무의미하다고 하여 역사에서 삭제하고 고구려를 변방국가로 규정하는 등 철저한 반도중심, 신라중심 사관인 삼한 정통론을 주장
한백겸은 회령으로 유배되었다)하여 북인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만,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했던 비주자학적 사상을 척결하는 사상정화 작업의 의미도 있었다. 특히 정여립은 사상적으로도 대단한 흠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정호훈, 『朝鮮後騎 政治思想 硏究 -17
⑵ 조선후기 실학자
재 요녕설
재 평양설
-한백겸: 주자성리학의 도덕적 편사 규범에 구애되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 강역을 문헌 고중의 방법으로 해명하는데 주력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인 패수는 청천강이고 왕검성의 위치한 열수는 한강”
-정약용: 패수= 압록강 설
why: 중화사상이 풍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