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용 ( Woon Young Ba E K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7] 제11권 195~230페이지(총36페이지)
놀이 가운데 일정한 역사성을 가지고 민간에서 발생하여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놀이를 통칭 민속놀이라고 한다.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경북지역은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그 고귀한 전통이 왜곡되거나 상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민속놀이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계승은 전통의 계승, 놂의 문화 회복이라는 점에서, 또 우리 민족의 건전한 신명을 되찾는 방법으로써 적극적 의의를 가질 수 있다. 현재 민속놀이는 전통적 기반이었던 농촌 사회의 붕괴와 도시화의 진행로 인해 급격히 인멸되고 있다. 또 민속놀이를 대신하는 전자게임의 활성화는 놀이의 주체를 놀이에서 소외시켜 놀이에 종속시켜 버린다. 건전한 놀이의 의식을 재구하기 위해서는 민속놀이에 대한 적극적 계승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계승은 민속놀이를 박제화하여 오히려 민속놀이의 생명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박지애 ( Jee Ae Park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7] 제11권 231~262페이지(총32페이지)
동제는 별신굿과 더불어 마을 공동체를 기저로 한 민간신앙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별신굿이 주기성을 지니고 무당굿의 형태로 전승되는데 반해, 일반적으로 동제는 마을 공동체의 안위와 평아능ㄹ 기원하며 유교식 절차로써 매년 진행된다. 경북지역은 문화?환경적 요인에 따라 북부 산간지역과 동부 해안지역, 중남부 평야지역으로 권역이 나뉜다. 북부 산간지역은 인격신 중에서도 구체적 인물을 마을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동부 해안지역은 동제에 비해 별신굿이 활발히 전승되는 지역이다. 동부 해안지역은 북부 산간지역에 비해 마을신의 신격이나 영험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지는 않다. 마을신의 영험에 기대어 마을의 안위를 기원하기 보다는 풍어제적인 성격이 강조되면서 별신굿의 위상이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동제의 위상이 약화되고 마을신격에 대한 담론도 간략화된 것으로 보인...
조유영 ( Yu Young Cho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7] 제11권 263~290페이지(총28페이지)
가투놀이는 일명 시조놀이라고도 불리며, 1920년대 초반에 만들어져 1940년대까지 널리 성행했다. 그리고 가투놀이는 전통시가인 시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가투놀이는 1920년대 초반 불선사의 <歌鬪>가 처음으로 발행되면서 나타났다. 이러한 가투놀이의 형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새로운 놀이문화에 대한 당대 사회의 요구라는 측면과 둘째, 시조에 대한 당대 인식의 변화라는 측면, 마지막으로 일본의 민속놀이인 <가루다>의 영향에 의한 놀이 형식의 차용, 이 세 가지 측면이 맞물려 새롭게 만들어진 놀이이다. 가투놀이는 또한 가투의 발행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는데, 1925년에는 한성도서본 < 歌鬪>가 발행되었고, 14927년에는 신민사에서 <精選 花歌鬪>가 발행되었다. 1928년에는 <改良 花歌鬪>, 193...
김남석 ( Nam Seok Kim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7] 제11권 293~320페이지(총28페이지)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박병호 ( Byoung Ho Park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6] 제10권 7~59페이지(총53페이지)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김현영 ( Hyun Young Kim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6] 제10권 61~83페이지(총23페이지)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정진영 ( Jin Young Jung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6] 제10권 85~113페이지(총29페이지)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문숙자 ( Sook Ja Moon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6] 제10권 155~183페이지(총29페이지)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홍윤표 ( Yun Pyo Hong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06] 제10권 185~262페이지(총78페이지)
본고는 1940년대 대표적인 대중 극단인 ‘아랑’에 대한 연구이다. 극단 아랑은 1940년대 한국 대중극제를 대표하는 극단 가운데 하나였다. 아랑은 창단 당시 황철이 주도하고 임선규?박진?원우전 등이 스텝을 맡았으며, 차홍녀?서일성?문정복 등이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1941년 10월에 접어들면서 아랑의 극단 체제는 개편되기 시작한다. 본고는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아랑의 변화를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랑의 변모에는 신파극단으로 폄하되던 대중극단의 고민과, 일제의 정책에 짓눌려야 했던 조선 연극 단체로서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