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
권근 ‘응제시’ 이후 ‘동국세년가’,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같은 조선시대 관찬사서에서는 단군의 자손이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린 연수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자리잡은 것은 바로 조선시대에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Ⅱ. 본론
1. 서거정에 대하여
1) 서거정의 생애
서거정은 조선 세종 2년(1420)에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주목사 미생의 아들로, 어머니는 양촌 권근의 딸이었고 그의 누이도 최항에게 출가하는 등 그의
권근․ 이첨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고 5품 이하 문신을 교리로, 7품 이하 문신으로 설서(說書)․정자(正字 )를 선발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다가 1400년(정종 2; 태종 원년)명칭이 보문각(寶文閣)으로 바뀌었다.
태종대에는 1410년(태종 10)․1417년(태종 17) 두 차례에 걸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집
그것을 채택케 됨으로써, 성리학의 본격적인 도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뒤이어 이제현,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및 정도전과 권근 등 고려말 향리 출신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계속 익히고 그것을 당시 통치술의 학문적·사상적 배경으로 삼으면서, 성리학은 명실공히 수용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권근(權近)의 <상대별곡>, 변계량의 <화산별곡>, 정극인의 <불우헌곡>과 작자 미상의 <오륜가>·<유림가>·<연형제곡>, 이 밖에도 김구의 <화전별곡>, 권호문의 <독락곡>등이 있다.
2) 경기체가의 명칭
경기체가는 이들 노래의 말미에 반드시 ‘위~景긔 엇더 하니 잇고’라는 문구를 붙이기 때문에 ‘경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고,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
권근은 「권학사목」에서 모든 경전의 학습에 앞서 「소학」을 읽어야 한다는 ‘소학선강’(小學先講)의 원칙을 내세웠다.
3. 조선의 교육과 현대공교육제도의 비교
1)조선의 교육
교육의 주도: 국가. 교육비 부담: 중․고등교육의 교육비 교육 대상: 원칙적으로 양반. 정규의 교육과정: 존재. 위
권근(權近) 등이다. 그런데 이들 제제다사와 익재 이제현 사이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존재한다. 익재의 계승자로서 역사적 영향력을 확장시킨 것은 목은의 공이었다.
2. 고려 문인들의 大元帝國下 의 세계 경험
원제국의 판도 속으로 칭기스칸과 그 후계자들이 공략했던 땅이 전부 포괄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