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본에 실리면서 여기의 합화인 오니가 그대로 도깨비로 둔갑한 것이다. 그런데도 해방 이후 우리 교과서에 그대로 오니가 도깨비인 줄 알고 실렸으며, 그것이 마치 도깨비의 본모습인 양 인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오니의 형상을 갖게 되면서 1980년대에는 귀면와(鬼面瓦)를 ‘도깨비와’로 부
국어독본』에 실린 운문을 창가화하여 불렀던 기록도 있기 때문에 당시의 국어교과서도 검토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용 도서 일람은 『한국 근대 학교교육 100년사 연구(Ⅱ)―일제시대의 학교교육―』(이혜영윤종혁류방란, 한국교육개발원, 1997) 202~224쪽의 표를 참조.
그
국어독본 등 교과서, 태평양전쟁 등과 관련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뉴스가 실린 일본판 신문 등 3백여 점 이상의 책자가 전시되어 있다. 이들 책 중 일부는 당시 한국에서 일본군의 정신대모집·창씨개명 과정 등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또 당시 일본군의 사진첩에서부터 구축할
국어독본'을 스스로 꾸몄다. 댓가지 끝에 헌 철필촉을 꽂아 백지로 묶어만든 공책에 무명을 입혀, 논어 맹자 대학의 교훈 문장을 우리말로 모아 베꼈다.
3학년 때, 일본인 담임 다까하시(高橋亨)가 외솔을 불러 세우고, '대종교에 다니는 것은 좋지 못하니 그만두라'고 일렀다. 그래도 외솔은 계속 다
국어교과서의 체제는 종래의 독본 형태에서 벗어나 학생의 사고를 자극하고 목표 기능을 길러줄 수 있는 단계별 활동 자료의 형태로 바뀌었다. 영역을 통합하여 유사한 교육과정 내용을 묶어 단원을 구성하였으며, 또 읽기, 문학 단원을 ‘국어’로 ‘말하기, 듣기, 쓰기, 국어 지식’은 ‘생활국어’
국어만의 독자적인 교육내용이 구성된 상태가 아니었고, 다만 읽고 쓰는 활동을 익히는 기능교과로 독본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재의 형식과 주제는 바뀌었지만, 교수-학습 방법상으로는 여전히 전통적 ‘독본식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國民小學讀本』은 최초의 교과
이루고 있는 기초 독본 접근방법은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읽기 교수 방법이다. 보통 최초의 읽기 교수를 위하여 음운 중심 접근과 그리고 두 가지를 혼합한 절충식 방법을 사용한다.
2000년 3월부터 적용되고 있는 제 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의 국어과 읽기지도 내용체계는 3단계로 구성되었다.
광복 후부터 1954년 4월 20일 문교부령 제35호로 공포된 ‘교육 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공포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교수 요목기라 한다. 광복 직후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교수요목이 없었다. 다행히 국어는 조선어 학회에서 지어 낸 ‘중등 국어독본’이 있었고, 국사는 진단 학회에서 마련한 ‘국사’
독본, 1923년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에 실린 소설들은 식민지교육의 일환이기 때문에 우리 국어교육사라 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교육의 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교육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46년 미군정 기에 발행한 초등국어교육과 중등국어교육교본에 의해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 텍스트는 6차에 비해 7차가 양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6차에서는 수록된 시조 텍스트의 대부분이 본시 학습 자료였다면 7차에서는 부차 학습 자료로 많이 수용되었다. 아래의 표를 보면 시조 텍스트가 부차 학습 자료로 수용된 예를 알 수 있다.
중 1-2
‘훈민가’, ‘오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