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를 섭렵하여 역사학에 조예가 깊어서 순암은 무주에 거주하던 시절 가학(家學)을 통해 역사와 학문에 대한 자질을 닦을 수 있었다. 조부가 별세(1735)한 이후 광주로 이주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고 학문에 매진하였고, 이후 관직 생활을 위해 상경한 때를 제외하고 말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마늘과 쑥의 약효를 인정하고, 지금도 자식을 원하는 부인이 수목·불절·암석 등을 찾아 기자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생활에 대한 보수성을 단편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 모두에게 공감을 주었기 때문에 그 원형의 전승이 가능했던 것이다.
역사를 정치의 시녀로 악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백제사」는 전 8장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특정부분에 편중되지 않았다. 즉, 백제의 발전과정, 경제, 통치체제, 인민들의 투쟁, 대외관계, 대외항쟁, 그리고 문화로 되어 개설서의 입장을 위하고 있다. 특히 백제의 대외관계를 중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고자하였던 일련의 학문을 여기서의 그 범주로 한다. 시대의 어려움에서 발생한 학문이므로 특정한 학파에서 발생한 움직임만은 아니었다. 서인, 남인, 북인 등이 고루 섞여있었고, 지역적으로도 그러하였다. 때문에 실학을 어느 한 학파의 전유물로 파악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
사상 세력이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에 편승하여 정계의 혼란을 빚어낸다. 이 같은 혼란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맞물려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여러 사건들의 계기가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결성되고 고종의 황제즉위 및 대한제국의 성립 등 혼란과 격변이 연속되었다. 이처럼 19세
대한민족적인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민족운동은 反侵略․反封建이라는 공동의 투쟁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을 깊이 관찰하고 유학적 이론과 사고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는 또 당시에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급진개화사상이나 위정척사사상의
임진왜란을 거치고 이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반상의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사회변혁을 거치기 시작했다.
양란의 결과, 농경지가 황폐화되었고 조정에서는 묵은 밭의 개간을 적극 장려했다. 이를 기회로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가 가능했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민족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야곱은 벧엘(지금의 예루살렘)이라는 곳에서 신앙경험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야곱(“속이는 자”)에서 이스라엘(“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로 이는 야곱이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후 야곱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
6.10 만세 운동은 주로 학생차원에서 다뤄졌다.
6.10 만세 운동의 역사상은 실체와 관계없이, 남북 분단체제에서 각기 극심한 반공이데올로기와 ‘주체사관’ 등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6.10 만세 운동의 역사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실체를 먼저 구명할 필요가 있다.
언표되는 민족의 발견에 직결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예언자적 기능은 1930년대에 이르러 대두되었다. 그 중심에는 무교회주의와 관련된 《성서조선》지의 김교신, 함석헌 등이 있었다. 무교회란 교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가 제도이며 조직체일 수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