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예과, 1925년 개교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서의 대학은 ‘대학령’에 의한다는 것뿐이었고 어떠한 형태와 명칭을 갖는 대학이 될 것인가에 대한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당시 ‘조선대학 예과’ 혹은 ‘조선예과대학’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었다.
(2) 경성제국대학
1. 서론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은 서울대학교(이하 서울대)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경성제대를 서울대의 전신으로 보고 있으며, 경성제대가 지닌 친일성을 서울대에 투영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서울대는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대학이라는
Ⅰ. 서언
경성제국대학은 설립과 운영의 주체가 누군인가라는 점을 잠시 접어둔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대학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대학은 일본식민지주의의 한국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명백히, 이
(1) 머리말
경성제국대학 (이하 경성제대로 약칭)은 일제의 식민지 착취기관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24년 5월부터 설립. 운영되다가 1945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미국인 총장과 교수가 임명되고 ‘경성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될 때까지 만 21년 5개월간 우리나라에 존속하였던 식민지 대학이었다. 이 학교
요구한 것이다.
1920년 1월 하순 일본 본국에서도 도쿄제국대학 명예학장과 교수 수 십 명이 [만선문화의 연구를 도모하기 위해서], 서울과 중국의 대련또는 여순에 대학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건백서]를 당시의 수상 ․ 문상 ․ 조선총독 ․ 관동청 장관에게 제출했다. 이 건백서는 당시
경성제국대학교 교수 시기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문학부문학과 조선어학조선문학 제2강좌 담당교수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조선어 연구를 시작했다. 향가 해독에 도전하여 본격적인 고대가사연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향가 및 이두의 연구郷歌及び吏読の研究』(1929)를 내 놓았으며,
경성전수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등의 관립전문학교 설치, 1918년 수원농림전문학교 설치, 사립전문학교로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설립 인가(認可)
․성균관 - 1908년 중등교육기관으로 전락한 후, 1911년 경학원 규정에 의해 폐교
․서당
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있었으나 일제가 이를 가로막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하였는데 해방 후 미군정이 이 경성제대를 기반으로 각종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서울대학교를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대는 경성제국대학교의 인적, 물적 자원은 물론 그 정신까지 이어받았다는 주장이다.
제 1단계는 개교기(開校期)이다. ’46.10월 개교에서부터 ’53.6월, 서울 환도 후 복교할 때까지 시기에 해당한다. ’45년 해방 후, 100여명의 유지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舊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하여 국립 종합대학을 세울 것을 제안하였고, 美군정청 학무국의 호응을 얻어 ’46.8.27일
대학원 과정
재학생 3,2241명 (2006년 기준)
리즈대학교 도서관
영국의 4대 연구도서관 중 하나
중앙도서관
3개의 전문도서관
2개의 부속도서관
4개의 부설시설
소장자료
장서량 270만여 권
정기간행물 9,000여종
서울대학교
1946년 구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하여 세워진 국립종합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