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희)의 정치
1874년 고종친정 이후 정치적 격변기마다 국왕권의 약화나 견제를 담은 綸音이 나왔다. 임오군란 직후, 갑신정변 직후, 원세개의 고종폐위시도 직후, 그리고 갑오개혁 직후에 그러했다. 개항기 정치상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나온 것이다. 윤음은 대체로 국왕의 이름을 빌린
1. 개화 초기에서의 고종.
19세기 조선사회는 18세기와는 달리 격심한 내적 동요까지 겹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18세기 조선사회는 영조․정조 등의 현군들이 성군절대주의를 표방한 가운데 신하들의 붕당 대립을 억제하면서 민의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민국(民國)정치 이념의 실현
♢ 답사를 준비하며
19C를 전후하여 한반도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갖가지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각계각층의 노력이 있었지만, 정작 자주독립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국왕, 즉 고종황제의 업적에
고종’(1852~1919)이었다. 지금까지 고종은 유약한 군주로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왕비인 민왕후의 갈등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위인으로 그려졌다. 또한 그는 유유부단하여 과단성있는 근대화 정책이나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고 평가되어 왔다.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사실 일본 제국주의
고종시대’는 한일합방이라는 망국과 연결되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왔다. 당시의 정치수반이었던 고종(高宗)은 무능력한 인물로서 암약(暗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식민시기와 해방 이후 일정시기까지는 ‘고종시대’뿐 아니라 조선 전시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이러한 인식은 일제뿐
고종과 민씨 지배하의 정부는 외국 세력에 의존함으로써 그 존립을 꾀하려는 의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국가적인 재정은 더욱 심하여 갔다“
“황제와 대신들이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 고식적인 길을 취하고 있을 때에, 정부의 무능한 시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
1. 개화 초기에서의 고종.
19세기 조선사회는 18세기와는 달리 격심한 내적 동요까지 겹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18세기 조선사회는 영조·정조 등의 현군들이 성군절대주의를 표방한 가운데 신하들의 붕당 대립을 억제하면서 민의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민국(民國)정치 이념의 실현을
Ⅰ. 들어가는 말
1.주제선정 이유
근현대사 속 여러 역사적 인물 중 뮤지컬이나 드라마, 문학작품 등 대중매체 속에서 명성황후의 모습을 다룬 매체는 많이 접해봐서 쉽게 떠오르지만 고종 황제 생애를 주제로 연출된 작품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아 나 뿐 만아니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종 황제
1. 고종황제(1852~1919.1.21 재위 : 1863~1907)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세력 다툼에 밀려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일본과 청, 서구 열강이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조선으로 진출해오자, 조선 내에서는 근대화의 방향과 수위를 놓고 극심하게 대립했고 이 와중에 고
고종의 대한 평가를 재조명하면서 결코 고종이 유약한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2. 본론
1)개항초기
서양문명은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동양사회에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부분에서 서양문명은 동양의 정치 지배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