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규정에 따라 관비생 선발에서 대학교육 이수자는 제외하고 대부분 실업교육 이수자만을 대항으로 함으로써 이들 중에는 대학 진학자가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사비 유학생도 유학생을 통해 ‘불온사상’이 유입, 전파된다는 이유로 유학 단계나 진학과정 자체가 철저히 통제되었다. 따라서 3·1
2)-1. 일본유학
-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되었을 당시, 70일간 일본시찰 후에 귀국하지 않고, 윤치호, 유정 수와 함께 일본에 남아 공부를 하고 싶단 뜻을 표명하고 조사(朝士)의 허락을 받음
- 1881년, 유정수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 (윤치호는 동인사의숙에 입학)
2)-2. 미국유학
- 1884~85 미국동
ㄷ. 의생활
조선인 여성노무자들이 가장 많이 간 후지코시 공장과 마쓰비시 공장, 누마즈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후지코시 공장에서는 작업복과 모자를 쓰고 회사 수첩을 윗옷 주머니에 넣은 채로 일을 했다. 미쓰비시회사로 동원된 전남출신 여성노무자들은 도덕 공장에서 작업복과
4. 개화기 시문학에서의 창작계층
4.1. 개화기 시가의 창작계층 연구
개화기 문학을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문학 사회학적 접근 방식으로 접근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도된 창작 계층에 관한 연구는 근래에 들어 다각적인 방향에서 깊이 있는 천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 방법과 접근의
Ⅰ. 서언
경성제국대학은 설립과 운영의 주체가 누군인가라는 점을 잠시 접어둔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대학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대학은 일본식민지주의의 한국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명백히, 이
유학생들은 1912년에 결성된 학우회라는 단일한 단체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가졌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유학생 단체는 존재했다. 그러나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1895년 4월 결성), 제국청년회(1895년 9월 결성)를 비롯한 각종 유학생 단체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1910년대 이전 시기는 관비
Ⅰ. 들어가며 - 작가 이인직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1862~1916)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12세 때부터 33세까지 민씨 세도정치 하였는데, 그동안 이인직은 관직을 얻지 못했었다. 1900년 2월 이인직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파견된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해 9월 그는 동경정치학교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간 그는 아버지의 약을 구하느라 전당포를 들락거린 어린 시절의 체험에 따라, 의술을 통해 민중을 구제하리라 생각하고 의학으로 지망을 바꾼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본 슬라이드에서, 간첩의 누명을 쓰고 생매장 당하는 동포를 구경만 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 명
안 국 선(安 國 善)
출 생 년
1878(고종 15)
호
천 강
출 생 지
경기도 안성
약 력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에서 정치학을 수학
•귀국 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국민계몽운동에 헌신하다가 1898년 독립협회 해산과 함께 체포, 투옥되어 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