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았다. 이런 선행 작업을 거친 뒤에 팔봉과 회월 그 밖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어온 이른바 내용-형식 논쟁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논쟁은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 비평을 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가에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박영희
박영희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경향과 태도를 몇차례 바꾸었던 문인 중의 한 명이다. 박영희의 전향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지만 시대적인 배경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박영희 소설과 계급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리는 박영희가 본격적으로 계급주의 문학을 전개
1. 기존연구 검토
박영희의 문학사 혹은 비평사적 평가는 비교적 불우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평가의 정점에는 ꡐ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ꡑ이라는 유명한 전향문구가 항상 가로놓여 있다.는 임규찬의 말로부터 이 선언을 발췌한 원문인『最近 文藝理論의 新展開와 그 傾
3. 시기별로 알아보는 박영희의 작품세계
3.1 낭만주의 문학기 (1920~1923)와 그 변화
박영희는 20년대 초『장미촌』,『신청년』,『백조』 1992년 1월에 창간되었으며,『장미촌』계와『신청년』계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낭만주의 또는 상징주의 문학의 요람으로 그 문학적 의의가 높
박영희의 「신경향파의 문학과 그 문단적 지위」(개벽, 1925. 12)라는 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민족해방운동을 펼쳐보려는 목적으로 여러 단체를 결성하는 동시에 <<개벽>>ㆍ<<신생활>>ㆍ<<조선지>>· <<신여성>>· <<공제>>등의 잡지를 발행하여 종래의 관념적
1. 시대개관
(1)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인해 여러 신문들과 문예지가 간행되어 문화의 저변이 확대되고, 서구문화에 대한 교양을 지닌 동경유학생 출신 지식인들이 대거 귀국하여 문화운동에 투신하면서 각기 동인을 형성한 까닭에 다수 문인시대와 다수 동인지 문단시대로 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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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인 조선의 해방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민족운동은 3ㆍ1운동을 기점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에 따라 민족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적 집단들이 속출했다.
또한 사내, 장곡천 총독의 군국
김기진과 박영희가 초기 비평활동에서 보여준, 문학과 사회에 대한 인식은 종래의 퇴폐적 낭만주의나 자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나타난 것이었지만 이것은 새로운 예술을 주장하는 신경향파 문학의 출현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22-23년은 조선사회에 사회주의 계열의 대중
계급 문학은 보통 '프로 문학' 또는 '경향 문학'으로 불리지만, 활동 초기에는 '신흥 문학' 또는 '신경향파 문학'이라고도 불렸다. 이 중 특히 '신경향파 문학'이라는 용어는 박영희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보통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조직 이전의 자연발생적 계급주의적 색채의 문학을 의미한
박영희의 이념에 좀더 분명한 노선을 제시했다.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은 이리하여 부분적 투쟁으로부터 대중적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니 즉 조합주의투쟁에서 정치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맑시스트는 <세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함에 있다.> 이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