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협회 회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56년 대하역사인물소설《서산대사》, 63년 중편 《임오년(壬午年)의 서울》을 썼다. 65년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밖의 주요작품으로 《무성격자(無性格者, 1937)》 《역설(1938)》 《봄과 신작로(1939)》,《폐어인(肺魚人, 1939)》
북조선최고인민회의 표창장 받음.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됨.
1950년 6.25동란 중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 12월 국방군의 북진을 따라 문화계 인사들이 이태준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 이태준이 평양에서 만난 애인과 그 자식만 남하
문학이란 카프 문학의 정통성에 기초한 것으로 규정된다.
주체 문예론 이전 북한문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북조선예술총연맹(1946.3.25)> →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 <조선문학가총동맹(1951)> 단체의 중심인물이 이기영, 한설야, 이찬, 안함광, 한요, 한재덕, 김사량, 윤세평, 박세영 등이 구 카프계
몰락하여 소작농의 처지로 떨어져 극도의 빈곤과 가난한 유년기를 보냄
이기영의 문학적 출발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 이기영은 고대 영웅 소설의 주인공을 동경하여 문학에 심취하게 되는데 이는 문학을 소박한 자기 위안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낭만주의적인 단계에서 그가 출발하였음을 말해 줌
문학건설본부(약칭 문건)로, 얼마 후 임화를 주도로 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1945.8.18)가 결성된다. 그러나 임화의 사상적 성향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민족 계열과 좌익 계열의 문인들은 각각 중앙문화협회(1945.9.18)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약칭 프로예맹, 1945.9.30)을 조직한다. 특히 좌익 계
예술의 볼셰비키화’를 위한 재 조직을 하자 출판부의 책임을 맡기도 했으며 카프 1차 검거 때 옥중에서 구상한 <서화>와 장편 <고향>을 발표하고, 문학예술로서의 사상성을 부정하는 김동인, 이광수 등과 맹렬한 이론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6년에는 북한 문학상 최초의 장편소설 <땅>을 발표하여 북한의
예술가로서의 지조를 그린「빈처」(1921)에서부터 단편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면모를 보이게 되고『타락자』(1922)와『조선의 얼굴』(1926)등 두 권의 단편집을 내었다.
초기에는 신변체험소설들을 썼으나 차츰 그의 필치와 문학적 기교를 가다듬어 본격적인 문학세계로 비약하게 된다. 이를테면「할
Ⅲ. 혁명예술
1. 혁명예술에 대한 설명
혁명예술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혁명적 문학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문학 및 예술작품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현했느냐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예술 작품들은 표면적으로는 권선
예술ㆍ이데올로기 및 정치를 둘러싼 예술관의 대결 현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우익노선 - 중앙문학협회
우익 문단의 움직임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빠르게 대응하는 좌익 문단과 견주어 한 걸음 처진다. ‘프로문맹’이 결성된 다음날인 9월 18일, 일제 시대에 순수 문학을 지향하던 민족
문학건설본부이다. 이 단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영화건설본부 등이 연합하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1945.8.18)를 결성하면서, 예술활동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해방 후 최초의 문화단체로서 그 조직이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